[책마을] 냉장고가 열어준 '쿨한 미래'

입력 2021-01-21 18:09
수정 2021-01-22 03:09

지난해 9월 냉장 상태로 운송돼야 할 독감 백신이 상온에 노출돼 큰 논란을 빚었다. 올해 국내에 도입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가운데 화이자 백신은 영하 70도의 냉동 상태로 유통돼야 한다. 이 때문에 콜드체인(저온유통체계)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콜드체인이 원활히 가동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를 담을 냉동 설비다. 《필요의 탄생》은 영국 런던과학박물관 큐레이터인 헬렌 피빗이 냉장고의 역사를 통해 식생활과 유통구조 등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생생히 묘사한 책이다.

지금은 냉장고가 없는 집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냉장고가 보편화된 건 반세기밖에 되지 않았다. 저자는 “먼 옛날부터 얼음과 냉기는 특별한 요리와 음료를 만드는 첨가제이자 음식을 장기간 보존하는 수단으로 귀하게 여겼지만 냉장·냉동 기술에 관한 현실적인 욕구는 최근까지도 매우 낮았다”고 말한다. 식품을 오래 보관할 때 발효와 건조 방식이 선호됐고, 얼음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장 기술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유럽이었다. 유럽에선 상류층을 중심으로 얼음 수요가 늘어났고, 냉장고 시장도 점차 커졌다. 1960년대 미국에선 가정용 냉장고가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저자는 냉장·냉동 기술을 “문명이 낳은 인위적인 욕망”이라고 표현한다. 또 냉장고의 대중화에 대해 “몇 세대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젠 우리 일상의 필수품이 돼버린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별난 사업과 직업이 수없이 탄생했다”고 설명한다.

냉장고는 식품 무역 시스템을 통째로 바꿨다. 저온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예전에는 비싸서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음식과 제철에만 겨우 맛보던 먹거리를 계절과 지역에 상관없이 즐기게 됐다. 현지 생산자는 저온유통 체계로 시장 가격 지배력을 적잖게 잃었다. 값싼 수입 식품 때문에 생산물 판매가를 대폭 낮춰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나라 농부들은 머나먼 땅에 새롭게 진입할 시장이 생겼다.

식탁 위 음식 모습도 달라졌다. 열대 과일인 바나나와 망고를 어디서든 먹을 수 있고, 노르웨이에서 잡힌 고등어를 싼값에 구할 수 있다. 냉장고 제조사들은 20세기 중반부터 판매 촉진을 위해 차가운 음식 제조법을 담은 요리책을 함께 배포했다. 냉장고가 사회의 주류 소비재가 됐다는 신호였다. 저자는 “이 문명의 이기 덕분에 인간은 제철 여부와 상관없이 수많은 농수산물을 맛보고 이용하는 사상 초유의 능력을 손에 넣었다”고 설명한다. 2012년 영국왕립학회가 “식품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은 냉장 기술”이라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냉장 기술이 현대 사회의 식량 공급과 식량 안보, 식품 안전에 필수라는 이유다.

냉장고가 제조업 식품산업 의료산업 등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쓰이는지도 소개한다. 냉장고는 양조 작업과 플라스틱 생산, 식품 가공 등 여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기기다. 극저온에서 세포조직 샘플을 냉동하거나 페니실린과 같은 주요 의약품의 개발, 더운 기후에서 변질되기 쉬운 백신의 안전한 보관을 가능하게 한 것도 냉장고다. 우주선과 탄약 공장, 댐 건설 현장, 대규모 과학 실험 등에서도 냉장고의 힘은 막강하다. 냉각기술 덕분에 열처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 후반부에선 미래형 냉장고를 전망한다. 인터넷이 연결된 스마트 냉장고, 환경 보호와 에너지 효율 제고를 동시에 이루는 냉장고 등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냉장고는 여태 그래왔듯이 우리와 줄곧 함께하며 말뜻 그대로 ‘쿨한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