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7년, 조선왕조 13대 임금 명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선조(宣祖)다. 선조 즉위 무렵 16세기 조선은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세조 왕위찬탈 유공자 그룹인 훈구대신들의 기득권에 사림파 유림이 도전했고 그 결과 많은 선비가 희생됐다.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사림파를 통해 조정을 장악하고 이전의 폐단을 극복하려 했는데, 이때 학문과 정치의 중심이 된 분들이 이황, 조식, 정철, 류성룡, 이이 같은 대학자들이다.
율곡은 당시를 위기의 시대로 인식했다. 조선왕조 개창이념과 정치제도가 170여 년이 지나면서 적절성을 잃었고, 유교적 이상국가는 퇴색하고 사회기강 문란과 궁핍이 만연했다. 위기의 타파 방안으로 율곡은 ‘군주의 자기 완성을 통해 이상사회가 구현될 수 있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구상했고, 새로 즉위한 젊은 선조의 수양을 돕기 위해 유교경전 가운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관한 금과옥조를 발췌 편집해, 제왕학 교과서이자 통치지침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바쳤다.
성학집요를 올리는 진차(進箚)는 조선 500년 최고 천재의 문장답게 단 한 글자도 버릴 것 없이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명문이다. 오늘날 경영자에게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갈 지혜를 주는 몇 구절을 옮겨 본다.
학문은 기질을 바꾸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정치는 정성을 다해 현명한 사람을 뽑아 쓰는 것보다 우선은 없습니다(帝王之學莫切於變化氣質, 帝王之治莫先於推誠用賢). 마음에 거슬리는 말이 있거든 도리에 맞는가를 생각하시고, 뜻에 맞는 듣기 좋은 말은 혹여 도리가 아닌지를 살펴보십시오(有言逆于心必求諸道, 有言遜于志必求諸非道). 곧은 소리를 즐겨 들으시고 말이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미워하지 마십시오(樂聞直之論 不厭其觸犯). 자신을 굽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남을 이기려는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십시오(無恥於屈己 以去好勝之私). 지금 전하께서는 착한 것을 좋아함이 지극하긴 하지만 선비들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 의심하시며, 악한 것을 미워함이 깊긴 하지만 비열한 자들이 꼭 그르지 않다고 여지를 남기십니다(今殿下好善非不至而又疑士類之未必眞是, 嫉惡非不深而又疑鄙夫之未必眞非). 백성을 병들게 하는 법은 제거하지 못하면서 경장의 부작용에 대해서만 근심하십니다(病民之法不除 而猶患更張之過).
과연 왕조시대에 임금에게 쓴 글인가 믿기지 않는 구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임진왜란 당시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용렬한 왕으로 후세에 각인된 선조조차 율곡의 상소를 물리치지 않고 그 후에도 대제학, 병조판서 등 요직에 그를 기용했다는 점이다. 최소한 인재를 쓸 줄 알았기에 선조는 41년이나 재위에 있었나 보다. 장수기업을 바라는 경영자들이 새겨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