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도장도 사장님께 인사하듯 기울여서 찍으세요"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입력 2021-01-18 06:47
수정 2021-01-18 08:26

"결재도장을 찍을 때 지점장란을 향해 기울여서 찍으세요."

2002년 제일권업은행, 후지은행, 일본흥업은행 등 3개 은행의 통합으로 탄생한 일본 3대 메가뱅크 미즈호은행. 도쿄의 한 지점에 새로 부임한 후지은행 출신 오쿠노 요코(당시 38세)씨는 제일권업은행 출신 상사의 지시에 어안이 벙벙했다. 후지은행에서 인감은 문자를 반듯하게 세워 찍는게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제일권업은행 출신 상사는 "지점장님을 향해 겸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사양함', '겸양'을 뜻하는 일본어 '오지기(おじぎ)에 '도장 인(印)'을 합한 '겸양 도장(おじぎ印)'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계장은 '폴더 날인'·전무는 '목례 날인'

20년이 지난 현재 미즈호은행 관계자는 "겸양 도장 같은 관행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권과 일부 업종에서 겸양 도장의 문화가 여전히 폭넓게 남아있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겸양 도장은 결재서류의 결재란에 도장을 찍을 때 직급이 낮을 수록 도장을 왼쪽으로 기울여 날인하는 방식이다. 계장은 인감을 거의 90도로 기울여 '폴더 인사'하듯 찍는다. 과장은 45도, 부장은 30도로 직급이 올라갈 수록 기울기는 줄어든다. 전무 쯤 되면 목례하듯 15도만 기울여도 되는게 겸양 도장의 불문율이다.



이렇게 말단부터 사장까지 날인을 하고 보면 인감도장들이 가장 왼쪽의 사장란을 향해 일제히 인사를 하는 모양이 된다. 조직의 위계질서가 결재란에도 반영되는 셈이다. 사인 문화권에서는 하려야 할 수 없는 겸양법이다.

지금은 중견기업 임원으로 변신한 오쿠노씨는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종업원이 수만명인 회사에서 이러한 수고와 시간의 낭비가 거듭되면 상당한 비용이 된다"고 지적했다.

상사의 결재란을 향해 기울여서 날인하는 방식이 예의에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전일본인장업협회의 후쿠시마 게이이치 전일본인장업협회 부회장은 "날인은 글자를 반듯하게 세워서 찍는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며 "비스듬히 기울이는 것은 아름다운 날인법도, 예의범절도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행정수속 99%, 인감 폐지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 이후 일본은 디지털화에 뒤처진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의 경로를 추적하기는 커녕, 확진자수 집계조차 실시간으로 하지 못한다. 지방자치단체간 온라인 시스템이 제각각이어서다.

소비를 장려하기 위해 전국민 1인당 10만엔(약 105만원)씩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정책은 반 년 넘게 걸려서야 겨우 끝났다. 구청 직원들이 신청접수부터 교부작업까지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2주 만에 끝낸 일이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재택근무를 실시했지만 인감 도장을 찍기 위해 직원들이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 때문에 작년 9월16일 새로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디지털화를 정권의 핵심 정책으로 내걸었다. 디지털화 달성을 위해 뜯어 고쳐야 하는 인습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 게 인감 문화다. 인감이 필요한 행정수속이 1만5000개에 달하다보니 디지털화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가 총리는 일본의 뿌리깊은 인감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고노 다로 전 방위상을 행정개혁·규제개혁상으로 임명했다. '비용삭감자(Cost Cutter)'란 별명을 가진 고노 장관에게는 '과감한 탈인감 정책'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취임 한 달만인 작년 10월 고노 행정·규제개혁상은 전체 행정수속의 99%에 인감 날인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주민표 교부, 혼인 및 이혼신고서, 원천징수 서류 등에 인감을 찍을 필요가 없어지게 됐다. 18일 통상국회에 관련 법안을 제출해 법으로 못박을 계획이다.

정부의 정책에 호응해 기업들도 업무상 인감을 폐지하는 대신 전자서명이나 전자인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자연히 겸양 도장의 시대도 저물 것으로 기대됐지만 오히려 디지털화의 흐름을 타는 분위기다. 일본 인감도장 1위 업체 시야치하타의 전자인감 서비스에서 겸양 도장의 질긴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시야치하타는 원래 목도장(크게 중요하지 않은 서류에서 본인 확인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도장. 막도장이라고도 부른다.) 전문업체였다. 이 회사가 1968년 발매한 목도장 '네임 인'은 즉석에서 만들어 쓸 수 있는 편리함과 저렴한 가격 덕분에 지금까지 1억8000만개 이상이 팔렸다.

시야치하타가 기업용 전자인감 서비스인 '시야치하타 크라우드'를 내놓은 건 시대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전자인감을 도입하는 기업이 급증한 덕분에 작년 2분기에만 가입고객이 27만여곳 늘었다. 기존 가입회사 수의 30배가 넘는다.



고객회사가 크게 늘어나자 시야치하타는 지난 11월 기업용 전자인감 서비스에 '겸양 인감' 기능을 새로 추가했다. 전자인감을 찍을 때 인감의 종류 뿐 아니라 날인 각도를 1도 단위로 지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덕분에 폴더 인사부터 목례까지 자유자재로 연출이 가능하게 됐다.

간단한 마우스 조작만으로 '전자 겸양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되자 전자 인감 서비스를 도입한 기업에서 겸양 도장이 늘어나는 기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시야치하타의 개발담당자는 "고객 기업들의 요청이 많아서 편의성을 높이는 차원에서(겸양 인감 기능을) 추가했다"고 설명했다.

인감이 필요한 행정수속의 99%를 없애더라도 남아있는 1%가 탈인감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꾸준히 나온다. 일본 정부는 법인등기와 부동산등기 등 83개의 행정수속에는 인감증명을 변함없이 유지할 방침이다. 고노 행정개혁·규제개혁상은 "제3자가 본인을 사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코로나가 낳은 新 비즈니스 매너

겸양 도장은 '1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재난'이라는 코로나19에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관습이다. 반대로 코로나19를 계기로 새로 생겨난 일본의 비즈니스 매너도 있다. 재택근무의 정착으로 화상회의가 늘어나면서 화상회의 전문 앱 '줌'과 관련해 생겨난 매너가 대표적이다.

작년 9월 줌은 화면상의 참가자 표시순서를 바꿀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수화통역이나 사회자를 고정할 수 있도록 해 참가자수가 많더라도 원활하게 회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능이라는게 줌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기능이 상급자를 화면의 좌상단에, 하급자를 우하단에 배치하는 '상석·말석 배치기능'으로 정착됐다. 매너 컨설턴트 니시데 히로코 대표는 고객기업의 젊은 사원들에게 화상회의를 시작할 때 미리 로그인해서 상사를 기다리고, 회의가 끝나면 가장 마지막에 퇴장하는게 적절한 예의라고 교육한다.

온라인 회의를 할 때 항상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상반신과 하반신 모두 정장을 착용할 것 등도 코로나19가 낳은 일본의 새로운 매너다.

반면 회식에서 상급자의 술잔이 비지 않도록 계속해서 술을 따라줄 것, 상급자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줄 것과 같은 회식 및 식사예절은 감염방지라는 명분으로 사라진 비즈니스 매너가 됐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