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18년 12월 퇴임 이후 수시로 정치판에 ‘소환’당했다. 본인의 뜻과 관계 없이 그랬다. 여야 모두 그에게 영입 손짓을 해 온 것은 그가 정치판에 먹힐만한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경제 최고위 관료를 지낸데다 세계은행 근무 경력 등 글로벌 마인드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정치판에 먹힐만한 ‘스토리’도 겸비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가난한 수재들이 진학한다는 덕수상고를 졸업한 뒤 은행(서울신탁은행)을 다니며 야간대학(국제대학)에 들어가 주경야독 끝에 입법고시와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여야를 떠나 유권자들을 끌어 당길 만한 큰 매력 포인트다.
김 전 부총리가 정치권에서 영입 후보로 거론된 이후 기자는 여러차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전화 통화를 가진 바 있다.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부총리 퇴임 이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단법인 ‘유쾌한 반란’활동 등을 정치적으로 바라보지 말아달라는 주문과 함께 정치에 대한 언급은 극도로 삼갔다.
그가 정치권에서 영입 대상으로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2019년 6월께다. 여야 모두 이듬해 4월 예정된 21대 총선거를 겨냥해 그의 영입 작업에 나섰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기자에게 “김 전 부총리는 문재인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를 지내면서 누구보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잘 알고 있어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고위 관계자도 “김 전 부총리는 취임 초부터 경제 정책을 놓고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와 마찰을 빚었다”며 “오히려 우리와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영입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나 김 전 부총리는 당시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고 연락도 많이 오는데 지금 자세하게 얘기하긴 어렵다”며 “무엇보다 지금 조용히 있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을 떠나 지방 여기저기 다니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며 “지난번 중국 대사 건도 그렇고 여러 군데에서 제안이 많이 오는데 다 거절하고 있다. 지금은 공직 생활을 되돌아 보며 반성과 성찰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부총리 퇴임 이후 주중한국대사 기용설도 나온 바 있다.
지난해 7월 초엔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에서 대선 주자로 급작스럽게 부상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기자 간담회에서 “올해 11월에는 통합당의 차기 대선 후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며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 후보로 나설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다”고 밝히면서다. 김 위원장은 또 “당 밖에 꿈틀꿈틀 거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은 김 전 부총리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김 부총리는 당시 경남 밀양 얼음골에서 농민들과 ‘유쾌한 반란’주제의 강연과 간담회를 하던 도중 기자와 통화를 갖고 “무슨 얘기냐”며 “금시초문이고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지금 단계에서 그런데 관심 가질 계제가 아니고 그런 일에 내가 끼어들 일이 뭐가 있겠나”고 반문했다.
지난해 7월 말 김 전 부총리는 기자에게 서울시장 후보로 거명되는 데 대해 “애초부터 생각도 없는데 뭘…”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경북 예천의 쌀아지매 농장 강연장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정치 얘기보다 부총리 퇴임 이후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유쾌한 반란’과 ‘소셜 임팩트 기업 포럼’의 설립 취지, 활동 내용, 향후 계획을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정치와 담을 쌓은 거냐’는 질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에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다”며 “여기 와서 (농민들과)호흡하고 얘기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고 민생이다. 이게 삶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가 다시 정치권의 주목을 다시 받은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그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첫 유배 생활을 한 전남 강진 사의재(四宜齋)를 찾아 ‘다산 선생과 국가의 앞날을 생각합니다’는 글을 남긴 게 알려지면서다. 정치권에선 정계 진출을 시사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소셜임팩트 포럼’ 행사에서 기자와 만난 김 전 부총리는 “확대 해석을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지금은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진정성을 갖고 집중하고 있다”며 “내가 하는 말과 일, 활동 하나하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니 조심스럽다”고 했다.
이어 “다산은 사의재에서 집필을 시작한 경세유표 서문에 ‘나라에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당장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고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다산의 사상은 공(公)과 염(廉)으로 압축 가능하다. 공은 공평과 공정, 염은 청렴을 의미한다”며 “모름지기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마음의 판(板)에 새겨야 할 귀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런 깊은 의미가 있는 사의재에 와서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더군다나 35년간 공직을 한 사람으로서 그런 생각은 당연한 도리”라고 덧붙였다. 사의재에 오면 누구나 나라를 생각하게 될뿐 특별히 정치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그럼에도 여야 모두 내년 대선을 앞두고 그를 그냥 놔 두지는 않을 것 같다. 콘텐츠와 스토리를 갖춘 그에게 정치판만 잘 마련해 준다면 유력 후보로 부상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권 외곽에 있는 김 전 부총리가 틈만 나면 영입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은 여야 모두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대선 불안감 때문이다. 여당은 서울시장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야당에 밀리고 있다. 국민의힘은 현재 거론되는 당내 차기 대선 후보들의 경쟁력이 여당에 크게 뒤지고 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선 출마 여부가 불투명하다. 출마하더라도 국민의힘 주자로 나선다는 보장도 없다. 그나마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던 나경원 전 원내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방향을 틀었다.
선거판에서 유력 후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상식이란 점에서도 여야로선 구미가 당긴다. 기존 유력 후보가 언제 어떤 유탄을 맞아 상처를 입거나 낙마할지 모른다. 경선 흥행을 위해서라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민주당이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입당 후 최소 6개월간 당비를 낸 권리당원에게만 공직 선거 출마 자격을 준 당규를 바꿔 입당 뒤 당비를 내면 바로 후보가 될 수 있게 한 것도 김 전 부총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부총리의 선택이 주목된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