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신춘문예 최고 기록은 5관왕…3개 부문 석권도

입력 2021-01-15 17:40
수정 2021-01-16 00:13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전날 야근하고 늦잠에 빠졌다가 꿈결처럼 전화를 받았다. “중앙일보 문학담당 기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신춘문예 당선 통보였다. 내 생애 가장 뜨겁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약 30년 전, 머리에 흰 눈을 가득 이고 선 북한산이 엷은 미소로 축하해주던 그날….

신문사들은 대부분 12월 초에 신춘문예 공고를 내고 크리스마스 전날 당선자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성탄 전날의 특별한 선물이다. 어쩌다 당선 통보가 늦어지는 일도 있다. 올해 한국경제신문 장편소설 당선자인 허남훈 씨(42)는 크리스마스 연휴까지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다가 29일에야 통보를 받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편소설 응모작이 워낙 많아 심사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신춘문예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5년이다. 당시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소설가 홍명희가 ‘신춘문예’ 공모를 시작한 이후 문단의 화려한 등용문이 됐다. 동아일보로 등단한 문인은 소설의 김동리 천승세 정연희 한수산 이문열 이창동, 시의 서정주 신동문 이성부 정희성, 문학평론의 조남현 최원식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조선일보도 1928년부터 소설가 계용묵 김유정 정비석 최인호 황석영 김인숙, 시인 백석 이근배 최하림 등을 발굴했다. 1955년 이후에는 한국일보가 소설가 하근찬 홍성원 김승옥 윤흥길, 시인 김종철 김기택, 중앙일보가 소설가 조해일 박범신 오정희 송기원, 시인 김명인 황지우 곽재구 나희덕 등을 배출했다.

최다 당선의 주인공은 이근배 시인이다. 그는 1961년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시조 부문에 각각 다른 작품으로 당선됐고 이듬해 조선일보(동시)와 동아일보(시조), 1964년 한국일보(시)까지 휩쓸며 ‘신춘문예 5관왕’을 이뤘다. 한국일보에 당선된 그해 동아일보에도 시가 뽑혔지만, 두 군데 동시 당선이어서 한 곳을 포기해야 했다. 가난한 그는 상금이 많은 한국일보를 택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문형렬은 1975년 매일신문(동화), 1982년 조선일보(시)와 매일신문(소설), 1984년 조선일보(소설)에서 4관왕을 달성했다. 3관왕인 평론가 강유정은 2005년 조선일보와 경향신문(문학평론) 당선과 함께 동아일보(영화평론) 가작까지 거머쥐었다. 장르를 넘나든 문인도 많다. 정호승 김승희 이병천 이승하 시인은 시에 이어 소설로 당선했다. 평론 분야의 남진우 김이구 정끝별도 시·소설에서 출발해 평론가가 됐다.

약 40년 전에는 ‘쓰레기통에서 건진 당선작’이 화제를 모았다. 1973년 중앙일보 소설 당선작인 박범신의 ‘여름의 잔해’는 예심 과정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가 담당 기자가 재발견한 덕에 빛을 봤다.


오랫동안 고배를 마신 사례도 많다. 소설가 조해일은 1962년부터 여덟 차례 낙방한 뒤 1970년에 당선했고, 소설가 김솔은 10년간의 투고 끝에 소원을 이뤘다. 고(故) 기형도 시인도 1982년부터 3년 연속 떨어진 뒤 1985년 동아일보로 등단했다.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은 “새해 첫날 내보이기엔 성애(性愛)가 너무 진하다”는 이유로 낙방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신춘문예는 한 장르에 딱 한 명만 뽑는다. 그만큼 가혹한 제도다. 그렇기에 가장 영예로운 등용문으로 불린다. 시상식장에는 감동과 환희, 꽃다발과 눈물이 교차한다. 당선을 기뻐하는 자리이자 앞으로 걸어야 할 혹독한 여정을 준비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난 13일 열린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인 김인숙 소설가는 신인들에게 “창작은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산물이기도 하므로 너무 자신을 채찍질만 하지 말고 세상과, 자신과 친해지는 노력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올해 응모할 문학 지망생을 위해 몇 가지 지침을 귀띔해주자면, 심사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회화적 이미지를 살린 표현, 신선한 사고력 등을 높이 산다. 겉멋 든 첫 문장, 형용사와 부사 남발, 현장감 없는 묘사 등은 금물이다. 최인호, 고2 때 수상…심사위원들 '깜짝'
소설가 최인호는 서울고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입선했다. 당선작 없는 가작이었다. 시상식장에 교복 차림의 18세 까까머리가 나타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4년 뒤 공군 병사로 입대한 그는 신병훈련소에서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는 “당선 소감까지 미리 써뒀지”라며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신병 작가’ 덕분에 동료 훈련병들은 전무후무한 특별 외출을 다녀오며 기쁨을 공유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인 백석도 18세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뜻밖에 그의 응모 분야는 단편소설이었다. 그는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제목의 단편에서 한 농촌의 남녀 불륜을 공동체의 소문 형식으로 그리며 인간의 욕망을 조숙한 솜씨로 다뤘다. 이후 그는 소설보다 시로 더 유명해졌다.

최연소 기록 보유자는 아동문학가 윤석중이다. 그는 최초의 신춘문예인 1925년 동아일보 동화 부문에 가작으로 입선했다. 그때 나이 14세였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