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감소,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 없어" 세계적 석학의 조언 [노경목의 미래노트]

입력 2021-01-15 23:08
수정 2021-01-16 09:00

“정부가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믿음부터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구학의 세계적 석학인 폴 몰런드 박사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2000년 64만명에 이르던 한국 출생아 수가 지난해 27만명 선까지 감소했다.

몰런드 박사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일정 정도 진전된 단계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인구감소가 시작되는 것은 어느 나라든 피하기 힘들다"고 했다. 제도나 시스템을 탓하는 대신 문화적 토양을 살펴야 한다는 분석이다. 출산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를 바꿔야 출산율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몰런드 박사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하고 런던대에서 정치인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 정치적 목적에 따라 나온 여러 국가의 인구 정책을 분석한 인구 공학(demographic engineering)을 출간해 이름을 알렸다.

2019년에는 과거 200년 세계 역사를 인구학의 관점에서 풀어낸 ‘휴먼 타이드(human tide)’로 월스트리트저널 등 여러 매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지난해 한국에서도 '인구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산업화가 인구 감소를 초래▷보통은 인구 증가는 산업 발전의 결과로 해석한다. 산업 발전으로 국내총생산이 늘수록 인구 증가 속도는 줄어든다는 식이다. 하지만 거꾸로 산업발전이 인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는데.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인구가 산업 발전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을 예로 들면 산업혁명을 통해 100년간 인구가 4배 늘었다.

하지만 그같은 인구 증가 없이는 영국이 세계 공장으로서 충분한 생산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도 급증한 베이비 붐 세대가 산업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역설적으로 초기 산업화로 불어난 신생아수가 줄어드는 시점에 산업발전 속도는 더 빨라진다. 젊고 활력 있는 근로자층이 두텁게 형성된 가운데 이들의 자녀들이 도시화와 높은 교육 수준의 혜택을 누리게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가 이같은 단계에 올라섰다. 하지만 모든 국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랍권 국가들은 도시화가 촉진되며 출산율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세계 경제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저출산이 꼭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은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출산율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서도 빠르게 떨어져 오랜 기간 낮게 유지되고 있다. 이는 이들 국가가 인구감소에 빨리 직면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출산율 저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문화적 요인이라고 본다. 우선 사회가 개인에 요구하는 교육 및 지식의 수준이 높으면 출산율은 감소한다.

결혼을 하더라도 자식을 하나나 둘만 낳아 자원을 집중시키는 선택을 부모들이 해서다. 여성들이 가족과 직장일을 병행하기 어렵도록 하는 환경도 당연히 문제가 된다.

기독교나 유대교의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서구 선진국과 비교해 가족 및 민족의 연속성에 대한 가치가 더 빨리 쇠퇴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인구 감소에 따른 국력 퇴보는 필연적▷늘어나는 인구가 국가 경제를 끌어올렸다면, 고령화와 인구감소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이 꼭 생산력 쇠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설비의 힘을 빌리면 나이 들었지만 숙련된 근로자 한명이 젊은 근로자보다 경쟁력이 있을 수 있어서다.

하지만 종합적인 국력을 놓고 보면 인구 감소는 국가의 지위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1인당 소득을 놓고 보면 유럽의 룩셈부르크가 중국에 몇 배 앞서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존재가 미미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등 신흥국들의 경제 발전으로 선진국과의 1인당 소득 격차가 줄어들면 인구가 국력에 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국력에서 일본이 중국을, 영국이 인도를 압도하던 시대는 끝났다. 국가들 사이에서 큰 힘은 많은 인구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도 인구를 중심으로 변화할까.

“그렇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유럽이 세계 패권을 장악했던 19세기 유럽 인구는 아프리카 인구의 2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리카 인구가 1.5배 많고 가까운 미래에 2배 이상으로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당연히 두 대륙 사이의 역학 관계도 바뀔 수 밖에 없다. 아프리카가 세계 무대에서 더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반면 유럽의 입지는 나날이 좁아질 것이다.”

▷한국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지난 10년간 269조원을 들였지만 신생아 수는 여전히 감소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출산율을 낮추는 것보다 올리는 것이 어렵다. 출산율을 낮추는 것은 여성 교육 수준 향상, 피임도구 보급 등으로 쉽게 이뤄질 수 있어서다. 여성 교육과 도시화로 산아제한 이전부터 출산율이 하락했던 중국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정부 정책으로 출산율을 높이기는 어렵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정책적으로 인구 늘리기에 나섰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도 실패했던만큼 국민이 자율적이고 국가는 선진화된 한국에서 정부 차원의 출산 대책이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 중에 출산율을 올릴 수 있도록 국민들의 사고 전환을 촉진할 단초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책보다 근원적인 원인 찾아야▷국가 차원에서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어렵다면 이민을 촉진하는 것은 어떤가.

“이민을 통해 인구 감소를 해결하려 했던 유럽 국가들은 기존 주민들과 이민자들이 융합된 다문화 사회를 만드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민이 대안이라고 꼭 말하기는 힘들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이민자를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한다면 인구감소로 정치적·경제적으로 국가가 종말을 맞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

▷이민을 받지 않고 기존 출산율만으로 인구 감소 함정에서 벗어난 국가는 없나.
“이스라엘이다. 내가 앞서 지적한 문화적 요인이 인구 증가에 큰 도움이 됐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유대교 율법을 적극적으로 따르면서 이스라엘의 합계 출산율은 선진국 중에 가장 높은 3명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 내부 아랍계와 서로 많은 인구를 갖기 위해 경쟁적으로 출산에 나서고 있는 점도 이유다. 저출산에서 벗어나려면 이스라엘 문화를 잘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AI와 빅데이터 등 기술 발전이 고령화와 인구감소에 따른 생산력 하락을 상쇄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나는 그 부분이 21세기에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령화를 맞닥드리고 있는 동시에 높은 혁신성을 가진 한국과 일본이 그같은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인구 감소가 꼭 재앙은 아니다"▷고령화와 인구감소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했는데.

“그렇다. 우선 거주자의 감소는 자연의 회복을 의미한다. 나는 프랑스에 두번째 집을 갖고 있는데 그 지역에는 100년만에 처음으로 곰과 늑대들이 돌아왔다.

비슷한 사례를 일본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20세기에 큰 문제였던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가 완화되는 것이다.

아울러 고령화로 세상은 더 평화로워진다. 늙은이들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강력범죄는 감소한다. 홍콩이 만약 중위연령이 40세가 넘는 지역이 아니었다면 최근 시위는 한층 폭력적으로 발전했을 수 있다.

그랬다면 시위를 지지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불행한 일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중위연령이 20세 안팎인 시리아에서는 한층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구 자연 감소를 맞아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고민이 크다.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앞서 말했듯 저출산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어서는 안된다. 한국인들 스스로 문화적 전통을 되돌아보고 출산에 가치를 부여할만한 요소를 이끌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이 셋을 둔 아버지로서 나는 부모가 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아이들도 최소한 한 두명의 형제 자매가 있을 때 더 행복하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