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호소인부터 백신추정주사까지…與의 신박한 작명법 [조미현의 국회 삐뚤게 보기]

입력 2021-01-11 12:11
수정 2021-01-11 17:06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8일 페이스북에 코로나19 백신을 빨리 확보해야 한다는 야당의 요구를 "국민을 대상으로 마루타 실험을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단어까지 창조했는데요. 바로 코로나19 백신을 '백신 추정 주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당 의원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백신을 백신 추정 주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코로나19 백신 확보가 늦다는 야당의 지적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민주당이 이런 '신박한 단어'를 만들어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행 피소가 알려진 뒤 민주당은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논란이 일었는데, 여성단체 출신인 남인순 민주당 의원이 피해호소인 단어 사용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사건을 프레이밍 하기 위한 새로운 네이밍"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프레임은 생각의 기본 틀 또는 뼈대입니다. '프레임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인간은 프레임에 갇힌다"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생각만큼 합리적이지 않다는 게 전제입니다.

조지 레이코프는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며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만드는 제도를 형성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바꾸는 일"이라며 "그러므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은 곧 사회 변화를 의미한다"라고 했습니다.

민주당은 주요 정책에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검찰 개혁', '언론 개혁', '공정 경제' 등이 일종의 프레임입니다. 개혁이나 공정이라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용어를 쓰면 해당 정책의 디테일과는 상관없이 검증과 토론이 어려워집니다. 이들 정책을 반대하면 '반개혁, 불공정 세력'으로 쉽게 낙인찍을 수 있습니다.


청와대가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탄도미사일 추정 발사체'라고 부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기가 아니라 무기로 추정되는 발사체라는 단어를 쓰면 북한의 위협을 희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피해호소인이나 백신 추정 주사 같은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동원한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사안의 프레임을 바꾸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아닌 피해호소인을 쓰면 성폭행 주장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백신 추정 주사 역시 마찬가집니다. 코로나19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당 인사들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국민들은 민주당 의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다는 겁니다. 장 의원의 발언이 알려진 후 당장 온라인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을 마루타로 만드는 것이냐"는 비아냥 섞인 댓글이 많았습니다. 문 대통령이 지난달 스테판 반셀 모더나 최고경영자(CEO)와 통화하면서 직접 코로나19 백신 확보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백신 추정 주사라는 표현까지 만들어 야당의 공격에 응수했지만, 오히려 백신 5600만명분을 확보했다고 자랑하는 문 대통령과 정부를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됐습니다. 장 의원은 결국 해당 글을 삭제했습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