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액 1000억원 이상의 대형 벤처펀드가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대규모 정책자금이 쏟아진 데다 스타트업 후속 투자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결과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사) 육성에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벤처시장 과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일각에서 나온다. 지난해 1000억원 이상 펀드 17개 나와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매체인 마켓인사이트가 6일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 전자공시와 업계 정보를 종합한 결과 지난해 신규 결성된 1000억원 이상 벤처투자조합(이하 대형 벤처펀드)은 17개로 잠정 집계됐다. 이는 2018년의 14개를 넘어선 실적으로, 지난해 대형 벤처펀드로 조성된 자금만 3조원을 넘는다. 5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해 벤처펀드 조성액의 60% 이상이 대형 벤처펀드로 구성된 셈이다.
개별 펀드 규모도 커졌다. 하나의 펀드에 운용 역량을 집중하는 ‘원 펀드’ 전략으로 유명한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가 국내 벤처투자 사상 처음으로 5000억원대 펀드를 결성한 데 이어 한국투자파트너스와 LB인베스트먼트가 각각 3000억원대 펀드를 결성했다.
지난해까지 총 60개가 결성된 1000억원 이상 벤처펀드 가운데 60% 이상인 37개가 2018년 이후 3년 내에 결성됐다. 정부가 한국벤처투자(모태펀드), 산업은행·한국성장금융(성장사다리펀드) 등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매년 2조원에 육박하는 정책자금을 투입한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벤처펀드의 대형화로 국내 벤처투자 생태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스케일업 투자가 활성화되면서 유니콘 기업 탄생에 국내 벤처캐피털(VC)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될 전망이다. 세컨더리 투자나 유망 기업을 초기부터 후기까지 육성하는 팔로온 투자(후속 투자), 좁은 국내 시장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외 투자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투자파트너스가 결성한 3500억원 규모의 ‘한국투자바이오글로벌펀드’는 글로벌 바이오 벤처에 집중 투자한다. 3100억원 규모인 LB인베스트먼트의 ‘넥스트유니콘펀드’는 유망 기업에 대한 후속 투자로 기업 가치를 키우는 스케일업이 핵심 전략이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대규모 펀드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려면 더욱 고도화된 전략과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며 “대형 펀드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면서 벤처투자 업계도 한 단계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업가치 거품 커질 우려도 제기정부가 ‘정책형 뉴딜펀드’ ‘스마트대한민국펀드’ 등 정책펀드들을 잇따라 추진하며 올해도 대형 펀드 결성은 이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대형 펀드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밸류에이션(가치평가) 거품 등 부작용도 예상된다. 대형 펀드의 투자 대상이 주로 시리즈B 이후 스케일업 단계에 들어선 기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VC 대표는 “펀드 사이즈에 비해 국내 벤처시장은 여전히 협소하고, 해외 투자는 코로나19 여파로 어려운 상황”이라며 “돈은 넘쳐나는데 투자 대상엔 제약이 있으니 밸류에이션 거품으로 이어지고, 이는 펀드 수익률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