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1월06일(14:28)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시장에 파장을 일으킨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의 행보가 또 다시 무위로 돌아갔다. 대한항공 이사회에서 관련 안건이 찬성표를 받으며 통과되면서다. 이는 지난해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졌던 LG화학의 배터리 사업부 분할 안건의 '데자뷔'다.
시장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국민연금의 결정이 이어지면서 일각에선 수탁위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나온다. 장기 투자자인 국민연금의 방향성과 달리 기업의 미래 성장성보다는 단기적 리스크 회피에 가중치를 둔 결정이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적이고 중립적인 판단보단 추천 단체의 입장에 따른 '편가르기'식 결정이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국민연금 반대에도 대한항공 유증 안건 '통과'
대한항공은 6일 오전 9시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발행 주식 총수를 2억5000만주에서 7억주로 변경하는 정관 변경안을 통과시켰다. 대한항공의 의결권 있는 주식 총수 1억 7532만 466주 가운데 55.73%인 9772만 2790주가 출석했고, 이 가운데 찬성률은 69.98%였다. 정관 변경은 특별 결의 사항으로 주총에 출석한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과 발행 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의 찬성이 가결 조건이었다.
이번 유상증자는 한진 그룹이 아시아나 항공을 인수하기 위한 과정이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해 2조 5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계획하고 있다. 인수를 위한 유상증자를 실행하기 위해선 필요했던 발행주식 총수를 늘리는 정관변경이 완료되면서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는 그대로 진행될 전망이다.
지분 8.11%를 보유한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5일 수탁위 결정에 따라 정관 변경에 반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날 정관 변경을 막지는 못했다. 대한항공 지분은 최대 주주인 한진칼과 특수관계인이 31.13%,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8.11%를 보유하고 있다. 이 외에 대한항공 우리사주(6.39%), 크레디트스위스(3.75%)이 주요 주주다. 일부 소액주주가 국민연금의 의견을 따랐지만 캐스팅보트를 쥐었던 우리사주조합 등 주요 주주가 찬성표를 던진 결과로 풀이된다.
경영계, 노동계, 기타가입자 단체가 추천한 민간 전문가 9명으로 꾸려진 수탁위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여부와 방향 등을 결정한다. 국민연금은 일반적인 경우 기금운용본부에서 직접 의결권 행사를 수행하지만 논란이 있거나 기금운용본부 차원에서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은 수탁위를 열어 과반수 표결로 결정한다.
대한항공 안건의 표결 결과는 총 9명의 수탁위 위원 중 반대 5명, 찬성 3명, 기권 1명으로 나타났다. 수탁위가 발표한 반대 의견 결정의 핵심 논거는 '절차상'의 문제였다. "아시아나항공 인수계약 체결과정에서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실사 없이 인수를 결정했고, 아시아나 항공의 귀책사유를 계약해제사유로 규정하지 않아 계약 내용이 대한항공에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이 수탁위 측의 설명이다.
투자 업계에 따르면 이번 안건에 대해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의결권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은 찬성 의견을,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인 ISS는 반대 의견을 권고했다. KCGS는 국적 항공사 통합이 가져올 수 있는 시너지를 강조했고, ISS측은 대한항공에 대한 유상증자 외의 인수 방식이 가능하다는 논거로 반대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미래 성장 가능성보다는 현재의 리스크 중시?
무위로 돌아간 수탁위 결정을 놓고 투자 업계선 "예견된 결과"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하늘길이 막히며 국내 항공 산업이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대한항공 중심의 통합은 대한항공에 있어선 중장기적으로 호재라는 인식이 업계 내에선 컸기 때문이다.
업계선 이번 대한항공 안건에 대한 판단이 지난해 11월 LG화학의 배터리사업 물적분할 안건에 반대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당시 수탁위는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의 찬성 권고에도 반대 의결권 행사를 결정했다. 성장성이 높은 배터리 사업 확대라는 분할 취지는 이해하지만 지분 가치 희석으로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이 있고, 사측이 분할 계획과 취지 등을 충실히 알리지 않은 절차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 수탁위의 설명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능성보다는 핵심 사업 분할이 야기할 수 있는 단기적 주가 하락이란 리스크에 방점을 찍은 결정"이라며 "중장기적 성장성보다 단기 리스크에 집착하는 것은 장기 투자자인 국민연금에겐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고, 이 부분이 시장의 판단과 괴리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어떤 것이든 재벌 대기업의 행보에 찬성하는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노동계 위원들의 입김이 세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수탁위의 기조는 이번 대한항공 논의에서도 이어졌다. 수탁위 발표 자료에 따르면 수탁위원 상당수는 양대 국적 항공사의 통합이 국제적 경쟁력 강화, 수익 증대 및 비용 효율성 제고 등 중장기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데엔 공감했다. 하지만 실사의 부재와 상대편 귀책사유에 따른 손실 가능성 등 리스크를 들어 반대를 결정했다. 미래의 비전보다는 당면한 리스크에 더 초점을 뒀다는 점과 결국은 조원태 회장을 중심으로 한 한진 그룹 일가의 경영권 유지로 이어지는 인수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LG화학 안건 판단과 판박이다.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을 반대 근거로 든 국민연금의 결정이 무색하게 국민연금의 반대 결정이 있던 지난해 10월 27일 63만 2000원을 기록했던 LG화학 주가는 이후 꾸준히 올라 6일 종가 기준 89만원을 기록했다. 같은 해 9월 회사 측의 분할 발표 후 70만원대 중반이었던 주가가 60만원대로 하락했던 단기적 효과를 상쇄한 흐름이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논의의 여지는 있겠지만 현재 상황만 보면 재무적 투자자를 자처하는 국민연금의 반대 결정이 무색한 상황"이라며 "수탁자위는 일단 '주주가치 훼손'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경영계-노동계 편가르기식 결정 이어져..."독립성 의문"
일각에선 연이은 반대 의결권 행사가 각계의 추천인사로 이뤄져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수탁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탁위는 경영계, 노동계, 지역가입자 단체가 추천한 각 3명씩 총 9명의 민간 위원들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각계에서 1명씩, 총 3명은 상근 전문위원으로, 나머지는 비상근 위원으로 참여한다.
상근전문위원은 오용석 금융감독원 연수원 교수(경영계 추천), 원종현 국민연금연구원 부원장(노동계 추천), 신왕건 FA금융스쿨원장(지역가입자단체 추천) 등 3명이다. 이들을 포함해 정우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부회장, 허희영 항공대 교수(이상 경영계 추천), 전창환 한신대 교수, 이상훈 서울시복지재단 공익법센터 변호사(이상 노동계 추천), 조승호 대주회계법인 대표, 홍순탁 에셋인피플 대표(이상 지역가입자 대표 추천)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된다.
위원들은 기업지배구조나 금융 관련 일정 기간 이상의 경력을 갖춘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LG화학과 대한항공을 비롯해 수탁위가 논의하는 대부분 사안에서 표결은 정확하게 경영계와 노동계로 편이 갈리고 있다. 캐스팅보트는 한국공인회계사회와 참여연대가 추천한 지역 가입자 단체 추천 인사 3명이 쥐고 있지만, 사실상 노동계의 입장과 일치하는 참여연대 소속 위원을 감안하면 기본적인 무게추는 4대 3으로 노동계쪽에 기울어져 있다.
과거 수탁위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대표성을 중시하는 기금운용위원회와 달리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국민의 노후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주주활동을 전문적, 객관적으로 수행하자는 것이 당초 수탁위 취지"라며 "지금은 그 목적이 완전히 상실되고 매번 편가르기식 결정만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깜깜이'나 다름 없는 표결 과정과 판단 근거에 대한 부실한 설명 역시 수탁위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높이는 요인이다. 수탁위는 회의 내에서 각 위원들의 찬반 의견을 묻지만 찬반 비율이나 어떤 위원이 어떤 의견을 냈는지 등 구체적인 사안은 모두 비공개로 부쳐진다. 원칙은 표결이지만 일부 이견에도 전원이 합의를 보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의사 결정의 근거 역시 대부분 한 두줄 정도로 짧게 제시된다.
수탁위 내 이견이 시장에 불필요한 잡음을 야기하지 않기 위한 조치란 것이 국민연금의 오랜 설명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그 대상인 기업과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 책임감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한 상장사 임원은 "명확히 어떤 근거로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찾아볼 수 없다"며 "국민연금이 대주주라면 그에 걸 맞는 책임도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편 올해 2~3월 기업들의 정기주총을 앞두고 수탁위가 맡은 권한은 보다 막강해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2019년 12월 '적극적 주주권 행사 지침'을 기금운영위원회에서 의결하며 이사 선임과 해임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올해는 1월 중 주주활동의 일환으로 투자기업 이사회에 최고경영자 승계방안 마련 등을 요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투자기업의 이사회 구성·운영 등에 관한 안내서'를 의결하고, 본격적인 주총 대비에 나설 계획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지난 해는 수탁위 구성이 늦어지고 코로나19 등도 겹치면서 국민연금의 주주활동이 제약됐다"며 "올해 사실상 처음으로 주주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수탁위의 역할도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탁위 의사결정 구조의 전문성과 객관성, 독립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국민연금의 결정을 둔 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