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채화' 선구자 산동 오태학…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오마주'

입력 2021-01-06 17:18
수정 2021-01-06 23:51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린 스케치가 아니면 그림이 아니다!” 스승은 사진을 보고 그린 스케치를 귀신같이 잡아내며 호통쳤다. 실수에는 엄했지만 성취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시절,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열곤 했다.

엄한 아버지이자 따뜻한 선배였던 스승은 이제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다. 절반이 자유롭지 못한 신체도 그의 예술혼을 꺾지 못했다. 왼손으로 더디지만 더 깊은 작품세계를 이어간다. 그런 스승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모였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열리고 있는 ‘사제동행’전에서다.

이번 전시는 채색과 수묵의 조화로 독자적인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산동(山童) 오태학(83)에 대한 오마주다. 산동의 7점과 함께 중앙대 한국화과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5명이 작품을 내놨다. 소시민의 일상을 채색화로 담아내는 고찬규, 한국화에 초월적 시선을 담아 아방가르드한 작품을 선보이는 김선두, 한국 채색화 계보를 잇는 김진관, 서정태, 향불로 한지를 태워 동양과 서양의 중첩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이길우 등 한국화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중견 작가들이다.

산동은 화선지를 여러 겹 발라 두꺼운 배지를 만들고 원색의 암채 분말을 바르는 ‘지본암채’를 처음으로 도입해 하나의 장르로 발전시켰다. 홍익대 재학 중이던 20대 초반에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로 뽑혔다.

그는 1980년대에는 돌가루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지본암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고향인 충남 부여 능산리 암각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여섯 겹을 쌓아올린 화선지 위에 색깔 있는 돌가루로 채색한다. 여러 번 덧칠한 위에 송곳이나 미술용 칼을 이용해 선획을 그으며 이미지를 구현한다. 고대 벽화처럼 거칠면서도 깊이 있는 색감을 가진 암채화는 그의 독자적인 장르가 됐다.

199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는 오른쪽 몸이 모두 마비됐다. 하지만 작업에 대한 집념으로 왼손에 붓을 쥐었다. 산동의 최근작에서는 유년의 기억과 꿈이 묻어난다. 여러 빛깔로 변주된 파란색 물고기를 배경으로 한가로이 앉아 있는 소년의 평화로운 얼굴은 우리 안의 순수함에 대한 동경을 자극한다. ‘산에서 뛰어노는 아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호처럼···. 은사의 굳은 몸을 주무르고 함께 운동하며 재기를 응원하는 제자들이 선보이는 동양화의 변주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전시는 이달 26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