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 굴지의 가전·TV업체 구매팀은 ‘초긴장’ 상태다. 제품에 들어가는 DDI(디스플레이구동칩), PMIC(전력제어반도체) 등의 핵심 반도체가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을 빚고 있어서다. 회사 구매팀 관계자는 “거의 모든 제품군에서 반도체를 원하는 만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며 “쇼티지(shortage·공급 부족)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 같아 생산차질이 우려될 정도”라고 말했다.
펜트업 소비로 반도체 수요 증가전자, 자동차 등 완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그래픽 처리, 데이터 통신, 신호 변환, 연산 등을 담당하는 ‘시스템 반도체’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의 반도체 생산량이 소비 확대에 따른 수요 증가세를 못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시스템 반도체가 장착되는 가전, 스마트폰, 차 등의 소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반발소비 확산, 5세대(5G) 통신과 인공지능(AI) 기술 확대 영향으로 늘고 있다.
대기업은 그나마 상황이 낫다.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떨어지는 중견 가전업체 A사의 구매팀은 요즘 반도체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회사에선 매일 ‘반도체를 최대한 확보하라’는 주문이 떨어지는데, 목표 달성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A사 관계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보다 반도체를 구하는 게 더 어렵다”며 “반도체가 없어 생산라인이 멈출까봐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5~10위권 업체에도 주문 몰려파운드리 생산이 수요를 못 따라잡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스마트폰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GPU(그래픽처리장치), 자동차용 반도체 등을 생산할 수 있는 7㎚(나노미터, 1㎚=10억분의 1m) 미만 초미세공정의 생산능력 한계 때문이다. 초미세공정엔 네덜란드 ASML이 생산하는 EUV(극자외선) 장비가 필수적인데, 연간 생산량이 40대 수준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1, 2위인 TSMC와 삼성전자가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싶어도 ASML의 생산 일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4일 경기 평택 EUV 라인을 점검하고 지난해 네덜란드 ASML 본사로 출장 간 것도 EUV 장비의 중요성 때문이다.
반면 AI, 5G 등의 확산과 자동차 전장(전기·전자장치) 기술의 발전 등으로 AP, GPU, 차량용 반도체 등의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자동차, 정보기술(IT)업체들이 원하는 만큼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GPU를 조달하지 못해 그래픽카드 신제품 공급에 애를 먹고 있는 엔비디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30㎚ 이상 공정에서 8인치 웨이퍼를 이용해 DDI, PMIC, 센서 등을 생산하는 5~10위권 업체도 상황은 비슷하다. 8인치 장비는 생산이 중단돼 증설 자체가 불가능하다. 공급과 수요의 불일치가 더욱 심한 상황인 것이다. 세계 10위 업체인 DB하이텍 관계자는 “4G 스마트폰에 PMIC가 4개 들어간다면 5G 스마트폰엔 9개가 필요하다”며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들까지 최근 재고를 쌓고 있어 향후 6개월간의 주문이 마감됐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부족 1년 이상 이어질 수도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면서 파운드리 서비스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TSMC는 대형 고객사에 제공했던 ‘3% 할인 정책’을 없앴다. 대만 UMC, VIS 등은 서비스 가격을 10% 이상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차량용 반도체를 설계, 개발하는 팹리스와 반도체 후공정업체 등 파운드리 생태계의 앞단과 뒷단에 있는 기업들도 덩달아 제품·서비스 가격을 올리는 추세다. 네덜란드의 차량용 반도체업체 NXP는 주요 자동차업체를 대상으로 제품 가격 인상을 통보할 계획이고 대만의 패키징(칩을 기기에 연결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공정)업체 ASE는 지난해 4분기 가격을 20% 올린 데 이어 1분기에도 추가 인상을 검토 중이다. 국내 한 패키징업체 관계자는 “대만 업체들이 가격을 올리면서 한국 업체들도 눈치를 보고 있다”고 전했다.
후폭풍은 자동차와 전자업체가 맞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글로벌 자동차 기업 아우디폭스바겐그룹은 전장용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1분기에 중국, 북미 등에서 생산량을 줄일 계획이다. 한 IT기업 관계자는 “반도체 공급 부족이 최소 1년 정도 이어질 것으로 본다”이라며 “제품 생산을 위해선 가격 인상을 감수하고라도 반도체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