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일류 기업 벼랑끝 내모는 '4류 정치'

입력 2021-01-04 17:54
수정 2021-04-20 17:27
“제발 우리를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지난해 기업인들한테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다. “기업들은 간섭하지 않고 놔두면 알아서 잘한다”는 말은 대기업은 물론 중견·중소기업 오너들도 이구동성이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 날 것”이라는 걱정도 태산처럼 컸다. 몇 안 되는 기업의 일탈을 잡겠다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초강력 상법·공정거래법을 강행하는 걸 두고 한 얘기다. 과잉·졸속입법에 위헌 논란까지 빚고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마찬가지다. “대표이사 처벌 규정이 너무 많아 매일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이라는 한탄에서는 기업할 의욕이 얼마나 꺾여 있는지 묻어났다.

“미래 투자를 위한 비상금마저 빼앗나”라는 토로도 끊이지 않았다. 중소기업들의 강력한 반대로 도입이 일단 유예되긴 했지만, 국내 기업의 31%(25만 개), 중소기업의 49.3%가 해당된다는 초과유보소득 과세 방침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약탈’한다는 편견은 오히려 중소기업들이 깨고 나섰다. “LED 조명분야에서 삼성 LG 등 대기업이 철수(중소기업적합업종)한 뒤 외국계 기업이 시장을 장악했고 중소기업들은 더 힘들어졌다.”(반도체부품 제조 B사 대표)

‘징벌적’ 상속세도 빠지지 않았다. 한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는 “회사를 열심히 키운 죄밖에 없는데, 자식에게 물려주려면 600억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럴 돈이 어디 있냐”고 목청을 돋웠다.

기업들은 지난해 수많은 적과 싸워야 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진 반(反)시장·반기업적 규제는 코로나19보다 훨씬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위기마저 기회로 돌려세운 한국 기업들이지만, 정치 권력의 전방위적 ‘기업 때리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상법 공정거래법 노동조합법 등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인 규제의 족쇄들은 올해부터 기업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붙들어 맬 가능성이 크다. 3월 주주총회장은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터로 변할 수도 있다. 적대적 세력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정비하고 경영권을 지킬 묘안을 찾느라 지금도 시간과 열정을 소모하고 있다. 노조로 복귀한 해고자가 파업과 공장점거를 주도해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

끝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 절망적이다. 새해가 밝았지만, 기업들은 암울하다.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4월)와 내년 대통령선거(3월)를 앞두고 선거 포퓰리즘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릴 게 뻔해서다. 지금도 규제로 숨을 못 쉴 지경인데 ‘끝판왕’ 격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집단소송제, 징벌적손해배상제 등이 번호표를 받은 상태다.

지난 연말 나온 경제단체장들의 신년사가 미래 희망보다는 정부·정치권에 대한 호소에 방점이 찍힌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이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법으로 규제하고 강제하는 방식보다는 자율적인 규범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기업 환경 개선과 투자 분위기를 높이는 정책으로의 획기적인 국면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적어도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원동력은 고비 때마다 위기와 한계를 돌파해낸 기업가 정신에 있다. 지난해 타계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일갈한 때가 1995년이다. 25년이 흐르는 동안 2류 기업 중에 초일류기업들이 탄생했지만, 정치는 아직도 3, 4류에 머물러 있다. “제발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 되겠느냐”는 기업들의 심정을 헤아리려면 우리 정치가 적어도 2류 수준까진 올라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