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에 본사를 둔 특허관리전문회사(NPE) TBT로부터 “반도체 특허 세 건을 침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TBT는 한 달 전 이 특허를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경쟁업체 대만 TSMC에서 매입했다. TBT의 배후엔 지난해 7월 삼성전자와 “향후 특허 소송을 하지 않겠다”고 합의한 모회사 ‘롱혼IP’가 있었다. 롱혼IP가 자회사를 앞세워 삼성전자 우회 공격에 나선 것이다. 삼성전자는 “롱혼IP가 의도적으로 합의를 깼다”며 지난달 미국 법원에 맞소송을 제기했다.
삼성·LG 타깃으로 특허 100건 모아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특허괴물’들의 소송 전략이 올 들어 더욱 치밀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NPE는 2~3년 전만 해도 다수 기업을 대상으로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 무차별 소송을 냈다. 최근엔 설립 이전부터 ‘특정 업종’을 염두에 두고 수년간 관련 특허를 매집하거나, 타깃 업체의 경쟁사로부터 특허를 사서 공격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2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아일랜드에 기반을 둔 NPE 솔라스오엘이디(Solas OLED)는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등 한국 대표 패널 업체의 ‘공공의 적’으로 꼽힌다. 솔라스오엘이디는 2016년 3월 아일랜드 더블린에 회사를 차리고 3년간 OLED 관련 특허를 집중 매수하고 있다. 최근 3년간 일본 카시오에서만 91건의 OLED 특허를 사는 등 총 100건에 가까운 특허 포트폴리오를 갖춘 솔라스오엘이디는 2019년 4월부터 지난 9월까지 본격적으로 한국 기업에 소송을 걸었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엔 대형 OLED 패널(TV)의 회로 기술, 중소형 OLED 강자인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전자엔 ‘스마트폰 엣지(모서리) 패널’ 관련 시비를 걸었다. 현재 소송은 미국, 독일 등에서 진행 중이다.
기존 특허를 재등록한 뒤 업데이트해 소송 규모를 키우는 ‘재등록(reissue) 전략’도 최근 NPE들이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업이 주력하고 있는 제품의 글로벌 시장이 커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미국 등지에서 특허를 재등록하고 제조기업에 소송을 거는 것이다. 우버, LG전자 등에 GPS 기술 관련 특허소송을 제기한 NPE ‘아이코롱고 텍사스(Ikorongo Texas)’가 대표적이다. 이 NPE는 2007년 처음 등록한 특허를 2013년, 2014년, 2020년 업데이트한 뒤 지난 3월 특허 공격에 나섰다.
특허괴물들의 비즈니스모델이 ‘돈이 된다’고 판단한 사모펀드도 ‘투자’에 나섰다. 1998년 설립돼 2017년 일본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사모펀드 ‘포트리스’가 가장 활동적인 NPE 펀드로 꼽힌다. 포트리스는 415억달러 규모 자본금을 바탕으로 1100명의 인력을 운용하며 세계 3대 NPE로 꼽히는 호주 유니록 등의 소송을 지원하고 있다. 특허청 관계자는 “사모펀드가 NPE에 소송비를 지원하고 나중에 배상금을 받으면 일정 비율로 나누는 행태”라고 설명했다. ‘일방적인 방어소송’에 기업 부담 커글로벌 시장에서 활약하는 국내 기업은 특허괴물에 대한 부담을 호소한다. 주력 제품 기술이 고도화되고, 세계 시장이 커지면서 소송 비용도 늘고 있어서다. 특허법인 동천의 박정규 대표변리사는 “연매출 7억5000만달러 이상 미국 기업의 특허 소송 비용이 2005년 총 17억달러에서 2019년 33억달러로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며 “특허 분석에 걸리는 시간도 길어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특허 소송에 붙잡히는 시간도 문제로 꼽힌다. 2016년 9월 NPE ‘넷리스트’로부터 서버 D램 특허 침해로 피소된 SK하이닉스는 2018년 1월에야 ‘비침해’ 결정을 받았다. 한 정보기술(IT) 대기업의 특허팀 관계자는 “미국 특허침해소송은 판결까지 약 2년6개월이 걸린다”며 “기업에 NPE 소송은 얻을 게 없는 ‘일방적인 방어소송’이라서 연구개발, 생산동력 등을 갉아먹는다”고 지적했다.
최근엔 NPE의 활동 영역이 IT 분야에서 자율주행차, 바이오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허방어 업체 RPX에 따르면 미국의 자율주행차 융복합 기술 관련 특허 소송 건수는 올 상반기 65건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26건) 대비 150% 늘었다. 한국지식재산보호원 관계자는 “미국에 제품이나 서비스를 수출하는 국내 기업은 NPE로부터 특허소송 위험성을 상수로 두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 NPE (non-practing entity)
특허권을 전략적으로 사들여 관련 기업에 소송을 걸거나 라이선스 계약을 강요하는 특허관리전문회사를 뜻한다. 주요 수익원은 기업에서 받는 배상금, 로열티 등이다. 생산활동을 하지 않은 채 특허를 기업 공격에 활용하기 때문에 ‘특허괴물(patent troll)’로도 불린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