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한국서도 IBM 같은 기업 많이 나와야

입력 2020-12-25 17:55
수정 2020-12-26 00:06
글로벌 컴퓨팅 회사 IBM은 소비자가 직접 매장이나 온라인에서 살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과거엔 결제단말기(POS기)와 컴퓨터, 프린터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비 시장을 겨냥한 제품을 만들지 않는다. 노트북 사업부를 2005년 레노버에, POS기 사업부를 2012년 도시바에, 반도체 사업부를 2014년 글로벌 파운드리(수탁생산업체)에 각각 매각했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그래서 IBM을 잘 모르거나 쇠락하고 있는 기업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IBM은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테크업계에서 ‘신’과 같은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가 특허 건수다. IBM이 지난해 미국에서 출원한 특허 건수는 9262개에 달했다. 미국 역사상 미국 기업이 받은 가장 많은 특허 기록이다.

작년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선 27년째 특허 1위를 지키고 있다. IBM이 보유한 특허권은 14만여 개다. 해마다 이를 통해 13억달러(약 1조4300억원)가량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BM은 반도체 시장에선 철수했지만 관련 핵심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어 반도체 제조사들이 반도체를 팔 때마다 IBM에도 수익의 일부가 흘러들어 간다.

IBM은 특허를 토대로 기술을 개발해 시장을 창출하고 이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OMR카드, D램 반도체, 플로피디스크, IBM용 PC, 은행들의 운영 시스템을 맡고 있는 메인프레임컴퓨터 등이 IBM을 통해 세상에 처음 나왔고 시장이 만들어졌다.

현재는 구글이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공지능(AI) 분야도 IBM이 먼저 뛰어들었다. 구글의 알파고 이전 체스 경기에서 처음으로 인간을 이긴 AI ‘딥블루’는 IBM이 만든 것이다. 지금은 양자컴퓨터 개발을 끝내고 테스트 중에 있다.

실리콘밸리의 한 엔지니어는 “IBM은 기술을 개발하면 핵심 기술만 제외하고 관련 기술을 공개해 시장을 키운다”면서 “이 과정에서 특허 사용을 대가로 라이선스를 받으며 매출을 올리고, 시장이 무르익으면 관련 시장에서 철수하고 다른 기술로 옮겨간다”고 설명했다. 그랬던 IBM이 지금은 제품 대신 기술 자체로 아예 옮겨간 것이다.

실제로 작년 매출 771억4700만달러의 대부분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 글로벌 테크놀로지 서비스(GTS)가 273억6000만달러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클라우드와 인지 컴퓨팅 소프트웨어가 232억달러로 뒤를 이었다. 글로벌 비즈니스 서비스(GBS)와 시스템 분야도 각각 166억3000만달러, 76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이들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부문의 매출을 다 합해도 전체 매출의 3%가 되지 않는다.

이들 사업은 기업의 디지털화를 돕기 위해 기업에 하드웨어를 설치하고 운영·보수하는 분야다.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을 공급하고 유지를 해주거나 보유한 AI를 토대로 기업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활용해 컨설팅을 해주는 영역이다. 고객 대부분이 기업일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항공, 미쓰비시 등 글로벌 기업들이 주 고객이다. 한국의 대기업을 포함해 상당수 은행과 증권사 등도 IBM 고객 명단에 올라 있다.

IBM은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는 소비시장에서 철수한 뒤 기술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기업고객 시장(B2B)으로 완전히 체질을 바꿨다. 수명이 평균 30년가량인 비즈니스 세계에서 내년이면 창립 110년이 되는 기업이 살아남은 비결이다.

기술력을 토대로 쇼핑몰에 자사 제품을 올리지 않아도 되는 ‘B2B(기업 간 거래)’ 시장에 주력하면 기업은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에서도 자유로워진다. 고임금 일자리도 자연히 따라온다. IBM의 소프트웨어 분야 평균 연봉은 15만달러(약 1억7000만원)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IBM이 고용한 직원은 지난해 기준으로 35만2600명에 이른다.

한국의 국민소득도 이미 3만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에서도 가격 경쟁이 치열한 소비 시장에서 벗어나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IBM 같은 기업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기업과 경제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아마존·MS·구글도 B2B 비중 커져한국 소비자들이 직구를 많이 하는 모바일 쇼핑의 대명사 아마존도 지난해 기준 쇼핑 관련 매출 비중은 전체 매출의 50.6%에 그쳤다. 나머지 절반가량은 웹서비스 등 기업들을 상대로 한 분야에서 나온다. 웹서비스는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기업에 인공지능(AI)을 통한 분석 등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작년 이 분야 매출이 400억달러(약 44조원)에 달했다.

컴퓨터나 노트북을 사게 되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는 운영체제인 윈도를 만든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이미 B2C(기업·개인 간 거래)에서 B2B(기업 간 거래) 시장으로 넘어간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꼽힌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을 크게 3개 분야로 나누면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운영체제 매출은 35%가량이고, 나머지 매출은 클라우드 서비스와 기업의 생산성 향상 소프트웨어 판매 및 컨설팅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계 검색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구글도 최근 들어선 검색과 유튜브 의존성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개인 소비자와 접점이 많은 구글 검색창과 유튜브 등을 통한 광고 매출 비중이 2017년 87%에서 2018년 85%, 지난해엔 83%대까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매출이 워낙 많은 회사여서 비중의 변화는 작지만 클라우드 서비스나 AI를 통한 기업 분석 서비스 매출은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