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북동부 에티오피아이고 인공재배를 시작한 곳은 아라비아반도 남서부 예멘이다. 예멘과 에티오피아는 홍해를 사이에 둔 경쟁 관계였다. 6세기에 에티오피아가 예멘을 지배해 자연스레 커피가 전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쯤 커피가 아라비아반도의 메카, 제다 등지로 전파됐지만 이슬람권 전역에서 유행한 것은 15세기 들어서다. 아랍어로 커피를 가리키는 ‘까흐와’는 술을 뜻하기도 한다. 술이 금지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는 일종의 비약(秘藥)이자 와인 대체재로 여겨졌다.
처음에는 커피를 으깨서 환약 형태나 빵에 발라 먹었다. 생두를 볶아 따뜻한 물에 넣어 마신 것은 13세기 들어서다. 커피는 수도자의 졸음방지제, 의사의 치료제에서 점차 부유한 이들의 사치품으로 변했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 물에 타 마셨다. 커피는 이슬람권에서 고수익 상품으로 거래됐는데, 이슬람식 커피하우스 ‘카베 카네스’가 생겨나 일반인도 쉽게 커피를 즐기게 된 것이다. 교황의 세례를 받은 커피 ‘기독교도 음료’가 되다오스만제국은 1536년 예멘을 점령한 뒤 모카항을 통해 커피콩 수출에 나섰다. 커피를 모카에서 이집트의 수에즈까지 배로 보내면 낙타에 실어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간 뒤, 베네치아나 프랑스 상인들에게 팔았다. 모카가 커피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배경이다.
유럽에서는 커피를 이교도나 마시는 ‘사탄의 음료’ ‘악마의 유혹’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중동, 이집트를 여행하며 커피를 맛본 유럽인이 차츰 늘고, 의사와 식물학자가 커피의 효능을 인식하면서 거부감은 옅어졌다. 일설에는 가톨릭 사제들이 커피의 유해성을 주장하며 교황에게 금지를 청원했는데 교황 클레멘스8세가 커피를 맛본 뒤 “이렇게 맛 좋은 음료를 이교도들만 마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커피에 세례를 내려 ‘기독교도 음료’로 승인했다고 한다.
커피가 먼저 전해진 곳은 동방무역이 활발했던 베네치아였다. 1615년 커피가 전래됐고, 1645년 카페로 불리는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도 생겼다.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1640년대에 커피가 대중적 음료로 자리잡았다. 오스트리아 빈에 커피가 전해진 과정도 흥미롭다. 1683년 빈을 포위하고 있던 오스만제국 군대가 퇴각한 자리에 낯선 콩 모양의 포대 500개가 발견됐다. 낙타 사료인 줄 알았는데 아라비아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폴란드 출신 통역사 콜시츠키가 커피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빈으로 가져가 커피하우스를 열어 성공했다. 프랑스는 18세기 후반 서인도제도의 식민지 산도밍고에서 커피를 재배했다. 19세기 들어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으로 커피 재배지가 확산됐다. 이성을 자극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혁명의 음료유럽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전에는 술이 일상 음료였다. 이런 유럽에서 커피를 마시게 된 것은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커피는 카페인 중독성 외에는 별다른 부작용이 없으며, 이성을 자극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음료였다. 마침 17세기 초 서인도제도의 설탕이 보급돼 쓰디쓴 커피의 대중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17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 커피 붐과 더불어 카페 문화가 대대적으로 퍼져나갔다. 영국에서는 옥스퍼드에 이어 런던에 ‘파스카로제 하우스’라는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탈리아 이민자가 만든 커피하우스 ‘르 프로코프’가 문을 열었다. 파리의 작가 음악가 배우 등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커피에 대한 반발도 일어났다. 남편을 종일 커피하우스에 빼앗긴 여성들이 커피 금지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커피 확산을 막을 핑곗거리를 찾던 영국 왕 찰스 2세는 ‘나태한 불평분자들이 국왕과 정부를 비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한때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커피는 18~19세기 정치혁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혁명도 커피하우스에서 잉태했다. 루이 14세 때 사람들은 살롱과 선술집 대신 커피하우스에 모였다. 미국 독립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은 ‘그린 드래곤’이라는 커피하우스 겸 술집에 모인 인사들이 주도했다. 보스턴항에 정박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차 상자 342개를 내던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인은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을 애국으로 여겼고, 차 대신 커피를 국민 음료로 삼았다. 커피하우스에서 번성한 금융과 과학17~18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정치인 지식인 종교인 작가뿐만 아니라 상인 무역상 금융가 변호사 선원 과학자 기술자 등 온갖 부류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커피하우스는 보험 증권 등 금융 분야와도 떼려야 뗄 수 없다. 1680년대 에드워드 로이드가 런던에 문을 연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보험업으로 발전했다. 로이즈 커피하우스에는 주로 해운업자, 선주, 선장, 무역상, 보험업자들이 모였다. 로이드는 보험업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선박 리스트를 담은 뉴스레터를 발행했다. 일부 보험업자는 로이즈 커피하우스에 부스를 임차해 영업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보험업자들의 협회인 런던로이즈의 유래다.
주식 거래도 커피하우스에서 이뤄졌다. 영국 정부가 증권 브로커의 수를 제한하자, 수많은 브로커가 조너선의 커피하우스에 모여 장외 거래소를 열었다. 런던증권거래소의 모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는데, 스미스는 이 책의 대부분을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집필했고 글을 미리 배포해 평가받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커피 문화의 중심지로 일컬어지는 미국 시애틀에는 흥미롭게도 스타벅스 본사와 함께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자리잡고 있다. 커피는 혁명의 시대에는 열정을, 혁신의 시대에는 이성을 북돋우는 특성을 지닌 셈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① 커피가 주로 생산되는 지역이 북위 25도에서 남위 25도 사이의 이른바 ‘커피 벨트’에 속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②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차(tea)보다 커피를 더 많이 마시게 된 미국인에게 커피와 차는 보완재 관계일까, 대체재 관계일까.
③ 신라시대 다연원(茶淵院)이라는 찻집이 있을 정도로 우리의 차(茶)문화도 발전했는데 서양처럼 금융업 발전을 이끌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