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대구를 따뜻하게 한 동화 속 주인공, 키다리아저씨의 마지막 기부.

입력 2020-12-23 14:58
수정 2020-12-23 22:11


대구의 익명 기부자로 유명한 키다리아저씨가 자신과 한 10년간의 익명 기부 약속을 마무리하며 23일 마지막 기부금을 내놨다.

키다리 아저씨는 2012년부터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말이면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찾아와 거액을 전달해온 동화속 주인공 같은 기부천사다. 지금까지 열차례에 걸쳐 기부한 성금은 10억 3500여만원에 이른다.

키다리아저씨의 기부는 연말연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뿐만 아니라 대구경북민들이 연말연시 나눔 문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신호탄'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도 동화의 주인공이 언제 나타날지 키다리아저씨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리고 매년 키다리아저씨가 올해는 정체를 조금이라도 밝힐까하는 기대도 키워왔다. 하지만 그는 10년간 거액의 기부 선행을 이어오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신분과 얼굴을 공개하지않았다.

23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키다리 아저씨는 늘 그랬듯이 전날 오후 전화를 걸어 "시간이 되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청했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직원들이 식당에 도착 했을때 이미 주차장에는 키다리 아저씨가 타고 온 10년이 훨씬 지나 보이는 승용차가 서 있었다. 골목 한 식당에 부인과 함께 나타난 그는 모금회 직원에게 5000여만원짜리 수표와 메모지가 든 봉투를 건넸다.

"이번으로 익명 기부는 그만둘까 합니다. 저와의 약속 10년이 되었군요"라며 시작한 짧은 글에서 키다리 아저씨는 마지막까지 우리 사회에 나눔문화가 확산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는 "함께하는 사회가 되길 바라면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 많은 분(키다리)들이 참여해 주시길 바란다"며 어려운 기부를 실천하면서도 "나누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많이 느끼고, 배우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적었다.

키다리아저씨는 경북에서 태어나 1960년대 학업을 위해 대구로 왔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장이 돼 생업 전선에 나섰다. 결혼 후 세 평이 안 되는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한 키다리 아저씨부부는 늘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해 왔고, 수익의 1/3을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누는 삶을 이어왔다. 작은 회사를 경영하며 위기를 겪게되자 기부 중단을 권유하는 직원도 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수익 일부분을 떼어놓고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다"는 생각으로 나눔을 이어왔다고한다.

2012년 1월 처음 대구모금회를 찾아 익명으로 1억원을 전달하면서 그는 '10년 동안 익명 기부'를 자신과 약속으로 삼았다. 같은 해 12월 그가 다시 1억2000여만원을 기부하자 대구공동모금회 직원들은 키다리 아저씨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2018년까지 매년 12월이면 어김없이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나 1억2000여만원씩을 전했다.

작년 12월에는 가족이름으로 다른데 기부를 하면서 평소보다 적은 2000여만원을 전달했다. 그는 "기부를 나누다 보니 적어서 미안하다"고 적었지만 많은 대구시민들은 “어떻게 2000만원이 적은 금액이냐”며 2만원도 선뜻 내지못하는 자신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는 반응을 이끌기도 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올해 5000여만원을 끝으로 익명 기부를 마무리했다.

키다리아저씨의 부인은 “두 번째 기부 때까지는 남편이 키다리 아저씨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며 "어느 날 신문에 난 필체를 보고 남편임을 짐작하고 물어서 알게 됐다"고 했다.
자녀들도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손자 또한 할아버지를 닮아 일상생활에서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선다고 키다리 아저씨 부부는 전했다. 그는 마지막 익명 기부를 하며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며 ”앞으로 더 많은 키다리 아저씨가 탄생해 함께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희정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처장은 "오랜 시간 따뜻한 나눔을 실천해 주신 키다리 아저씨께 깊이 감사드린다"며 “키다리의 아저씨의 당부와 같이 더 많은 키다리 아저씨들리이 나눔을 이어 국채보상으로 빛나는 나눔의 전통을 잇는 대구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