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시간의 축적…'판박이' 판을 깬 판화

입력 2020-12-20 17:05
수정 2020-12-22 14:05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진다. 하늘에서 빛을 흘려보내는 것만 같다. 서정희 추계예술대 판화과 교수의 2018년 판화 작품 ‘거룩한 기름부으심(The Sacred Anointing)’이다. 성경 내용을 판화에 담았다. 비단이나 나일론 같은 천에 잉크를 발라 찍는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했다. 그 빛은 강렬하기보다 포근하고 따뜻하다.

일반 회화와 다른 현대 판화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성찬이 펼쳐진다. 21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개막되는 ‘서울 프린트클럽 판화 초대전-소중한 선물’이다. 회장인 서 교수를 비롯해 이영애, 정미옥, 이경희, 오영재, 이윤령, 정희경, 황재숙, 임정은, 윤세희, 김광숙, 조을선, 이상은 등 서울프린트클럽 여성 작가 13명이 참신하고 다양한 기법의 현대 판화 31점을 내놨다. ‘과정의 미학’ 담은 판화의 세계 1980년 현대 판화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결성된 서울프린트클럽은 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여성 작가 그룹이다. 현재 42기째 이어오고 있다. 기수별 회원은 10여 명이다. 서 교수는 “동양화, 서양화 등 각자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작가들이 판화를 통해 표현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며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하며 매년 전시를 열고 있다”고 설명했다.

판화는 1980년대 많은 관심을 받았으나 1990년대 이후 저평가돼 온 게 사실이다. 여러 장 찍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근 판화에 관심을 갖는 20~30대 작가와 관람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을선 작가는 “일반 회화와 달리 판화는 찍혀 나오기까지 결과를 예상할 수 없다”며 “그런 과정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했다. 상명대 교수인 이상은 작가는 “같은 작품을 찍어도 결과물이 섬세하게 달라 찍을 때마다 새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엔 실크 스크린뿐 아니라 메조틴트, 애쿼틴트, 에칭 애쿼틴트, 드라이포인트, UV프린팅 등 다양한 기법의 판화 작품이 걸렸다. 정희경 작가의 2019년 작품 ‘책방(Librairie)’은 메조틴트 작품이다. 동판을 검게 만든 다음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에 맞춰 표면을 깎아냈다. 정 작가는 이를 통해 책방에 쌓여 있는 책들의 질감과 종이의 미세한 결까지 표현해냈다. 정 작가는 “메조틴트는 어둠에서 빛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며 “책방 한쪽에 있던 오래된 책 속에 숨겨진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느낌을 표현했다”고 했다. 다양한 기법 적용된 현대 판화종이를 켜켜이 쌓아 기억과 시간의 축적을 담아낸 작품도 있다. 조 작가의 ‘시간에 대해 언급하다’ 시리즈(2013~2015)다. 종이를 접어 하나씩 쌓았다. 멀리서 보면 이 종이들의 합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정육면체를 발견할 수 있다. 조 작가는 “신문이 쌓여 있는 걸 우연히 보고 단순히 종이가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쌓여 있다’는 걸 깨닫고 작업을 시작했다”며 “그 표면에 나타난 정육면체는 시간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올해 선보인 신작 ‘색동 202025’도 시간을 디지털 프린트로 표현했다. 색동저고리와 같은 다채로운 색깔의 선이 세로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규칙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정형적 패턴이 발견된다.



이들은 앞으로도 판화를 알리는 데 적극 나설 계획이다. 서 교수는 “맹인학교에서의 ‘찾아가는 판화’ 수업 등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판화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며 “코로나19 때문에 올해 40주년 기념전을 열지 못했는데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지방의 문화 소외 지역에서 열고 싶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1월 14일까지.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