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남동산업단지에 있는 중소 제조업체 A사의 김모 사장은 최근 한 브로커에게 30만원을 주고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자금을 받을 수 있는지 평가를 부탁했다.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고는 이내 브로커에게 사업계획서 작성을 맡겼다. 1억원의 정책 자금을 받으면 20%에 해당하는 2000만원을 수수료로 떼주는 조건이었다. 김 사장은 “정책 자금 지원은 서류 작성이 어렵고 복잡해 전담 직원이 2~3명 붙어야 할 정도”라며 “브로커를 써야 성공 확률이 높다는 얘기를 들어 서류 작성 일체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내년 중소기업 지원 사업 공고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업계획서를 대신 작성해주겠다” “정부에 승인받도록 해주겠다”는 식의 브로커 광고문이 시화·남동·반월 등 주요 산업단지 내 기업들에 뿌려지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신용보증기금 출신 등의 ‘전관’을 내세워 “정부 지원을 보장하겠다”고 마케팅하는 곳도 많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엔 ‘중소기업 OO센터’ ‘중소기업 OO원’ 등 정부 기관과 비슷한 명칭의 민간업체들이 올린 ‘정책자금 승인 노하우’, ‘성공 사례 다수’ 등의 홍보 글이 수십 건씩 게시돼 있다. 브로커 대부분은 컨설팅회사로 등록해 활동하고 있다. 전국에 8000~1만여 개 브로커 회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브로커들은 정부 융자(대출)사업보다 갚을 필요가 없는 R&D나 시설 개선, 인력지원 사업 등에 주로 개입한다. 중소기업 R&D 예산은 중기부와 산업부 것만 합쳐도 연간 3조원대에 이른다. 기업당 1억원씩 받는다고 가정하면 3만 개 이상 중소기업에 혜택이 돌아간다. 경쟁률은 보통 3~4 대 1이 넘는다. 브로커의 가장 큰 폐해는 과도한 수수료다. 어렵고 영세한 기업일수록 사업계획서상 ‘포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책 자금의 40%까지 수수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중소기업이 브로커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원 서류 작성이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올해 2400억원 규모 예산의 중소기업 기술혁신개발 사업은 기술 개발 필요성, 창의·도전성, 시장 규모 및 성장성, 글로벌화 역량, 수출 계획의 실현 가능성 등을 사업계획서에 담아 제출해야 한다. 대부분 R&D 지원사업도 기술성과 시장성, 경제성에 대한 국내외 기관의 정밀 분석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를 자체 인력으로 소화할 수 있는 중소기업은 거의 없다.
한 중소 제조업체 대표는 “브로커에게 주는 돈이 아까워 ‘독학’으로 지원 서류를 준비해 보니 100쪽의 사업계획서를 만드는 데 2주간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고 했다.
지원 사업 종류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중기부, 산업부 외에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고용노동부, 환경부 등의 사업에 더해 지방자치단체별 정책 자금도 쏟아지다 보니 기업들이 일일이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중소기업 지원사업 안내 포털인 ‘기업마당’에 따르면 중소기업 기술 관련 정부 진행 사업만 266건이다. 중기부와 유관기관들의 2020년 지원 제도 안내 책자 분량만 무려 1400쪽에 달한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 정책 자금 지원 계획이 연일 쏟아지고 있지만 브로커의 배만 불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며 “지원업무 대행을 주업으로 하는 브로커는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기부 관계자는 “현행법상 개별 업체 간 경영컨설팅 계약에 정부가 간섭할 수는 없다”면서도 “서류 간소화를 추진해 브로커 개입을 줄이겠다”고 말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