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절약의 역설’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가계가 절약에 나서면 가계의 살림살이는 좋아지지만, 총수요가 줄면서 전체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전문가들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걱정이 한국에서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가계저축률은 작년(6.0%)보다 4.2%포인트 오른 10.2%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13.2%) 후 21년 만에 10%대에 다시 진입하는 것이다. 저축률은 가계가 살림살이에 쓸 수 있는 처분가능소득(가처분소득) 등에서 저축액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저축률은 2017년 6.5%, 2018년 6.1%, 2019년 6.0%로 낮아지는 추세를 보였지만 올해 돌연 급등했다. 저축률이 올랐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소비가 줄었다는 뜻이다. 올해 1~3분기 평균 소비성향(소득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68.0%로 작년 평균(72.2%)보다 4.2%포인트 낮아졌다.
경제 전문가들은 가계가 저축을 늘린 배경으로 코로나19 불확실성과 집값 과열 등을 꼽았다. 코로나19로 경기가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앞으로 벌이가 시원찮을 수 있는 만큼 가계가 ‘예비적 저축’을 늘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용대 한은 조사국 과장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된 데다 감염 우려도 커지면서 바깥나들이와 외식을 자제하면서 소비가 위축된 영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치솟는 집값이 씀씀이를 옥죄는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오름세를 보이는 집값을 마련하거나 육중한 부동산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소비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한은이 2018년 작성한 ‘최근 가계저축률 상승 원인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실물투자(부동산 투자)가 1%포인트 증가할 때 가계저축률은 1.3~3.6%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주택 가격이 오르면 그만큼 가계저축률도 높아진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민간소비를 북돋으려면 중장기적으로 주택 가격을 안정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가계부채도 지갑을 닫게 하는 변수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지난 3분기 말 기준 100.6%로 사상 처음 100%를 돌파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당분간 0%대를 이어갈 전망이기 때문에 실질금리(명목금리-기대 인플레이션)가 오르고, 가계의 빚 상환 부담은 커지면서 소비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
케인스가 경고한 것처럼 저축률 상승이 장기 침체를 부를 것이라는 경보음도 커졌다. 저축이 늘고 소비가 줄면 그만큼 기업 창고에는 재고가 쌓인다. 기업은 고용을 줄이고, 소득이 감소한 가계는 씀씀이를 다시 줄이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