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재의 산업지능] 제조업 디지털 전환, 적응 아닌 혁신이어야

입력 2020-12-13 16:23
수정 2020-12-14 13:26
‘프로젝트 개미지옥’. 디지털 전환 시대를 맞은 국내 글로벌 제조 기업이 처한 현 상황을 대변해주는 키워드다. 변화에 적극적이고 신속히 대응하는 능력은 국내 제조기업들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게 한 원동력이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국내 글로벌 제조기업들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이런 적극적이고 신속한 대응은 찬사를 받을 만하다. 문제는 이런 프로젝트가 리더의 전략과 비전이란 소위 큰 판을 그리는 변화가 아니라, 마치 오른손으로 하는 일을 왼손이 하게 하는 정도의 소규모 프로젝트만 만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점진적이며 소규모적인 프로젝트만 하다 보면 진정한 변혁을 이루기는커녕 변화에 잘 적응하는 중이라는 착시만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런 현상은 다른 산업보다 제조업에서, 특히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글로벌 제조업에서 더욱 많이 목격된다.

디지털 전환은 단순한 점진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혁신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배달음식산업의 예를 살펴보자. 과거 음식 배달 업무는 치킨집이나 중화요리점 등 음식점 자체에서 관리했다. 업체별로 관리하다 보니 어떤 음식점은 배달원이 모자라 배달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 그 옆의 음식점 배달원은 일이 없어 대기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배달 앱이 활성화되고, 배달 업무가 각 음식점 업무에서 독립되면서 전체 시장의 배달 업무 효율이 크게 증대됐다. 각 음식점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상황에서는 배달 업무를 고도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배달 업무를 수많은 업체와 함께 엮어 관리하면 다양한 배달 업무를 고도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음식이 자주 배달되는지, 어떤 시간대에 무슨 음식을 시장에서 요구하는지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배달 경로 알고리즘을 최적화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과거 전단지에만 의지했던 동네 음식점 마케팅도 디지털화할 수 있게 됐다. 이런 혁신은 단순히 전통산업의 플렛폼화로 해석할 수 있지만, 기업 내부 디지털 전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전략을 도출하는 아이디어로 활용할 수도 있다.

다시 제조업으로 돌아가서, 위 배달 앱의 사례를 제조업에 적용해 보자. 대부분의 국내 제조업 조직은 부문별, 기능별로 잘게 쪼개져 있다. 조직적인 관리를 위해 품질·생산·기술·설비 등 수많은 조직이 각자의 목표와 평가기준을 갖고 운영하는 구조다. 여기에 제조 연관 부서인 제품 설계, 서비스 조직과 연계하면 연관 조직이 여간 복잡해지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조직별로 각자의 목표에만 집중된 프로젝트가 만발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는 조직적인 관리를 위해서는 효율적이지만 고객 가치 창출 면에서는 효율적이지 않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부서별로 독립적인 정보기술(IT) 시스템을 운영하고 데이터도 별도로 관리해야 했다. 과거 배달 업무를 음식점별로 독립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다. 하지만 이제는 발전된 IT를 기반으로 관리 중심의 조직이 고객 가치 전달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예를 들어 생산된 제품에 불량이 발생했다면, 불량 원인이 설계 문제인지, 생산의 문제인지, 서비스나 유통상 문제인지를 파악하기 전에 설계부서와 생산부서 그리고 유통 담당부서의 이해관계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조직의 구조가 기술이 들어갈 길을 막을 수 있는 사례다.

디지털 전환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나뉘고, 쪼개진 조직에서 부서별로 독립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형식으로는 거대한 혁신을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디지털 전환은 발전된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프로세스를 정비해 좀 더 큰 고객 가치를 창출하고 업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전면적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리더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