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우산국을 복속시킬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
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
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 받은 ‘울릉도식’이고, 안에서는 유리옥(금동 혁대장식) 등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발해인들은 727년부터 200여 년 동안 일본국에 공식 사절만 34번 파견했다. 동해북부 사단항로나 동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할 때는 울릉도와 독도를 중간 물표로 삼았을 것이다. 그 후 동여진 해적들이 동해 해안의 일부 지방과 울릉도까지 점령하는 상황이 되면서 고려 정부는 공도(空島)정책을 취했다. 이 때문에 울릉도는 12세기부터 약 200년 동안 빈 섬이 됐다. 하지만 풍부한 수산물을 잡거나 너도밤나무 같은 목재로 배를 만드는 어업집단들, 물개나 해달의 모피 등을 무역하는 집단들은 비공식적으로 머물렀다. 그뿐만 아니라 항해하는 사람들은 피항, 급수, 식량 보급, 또는 해적소굴로 이용하기 위해 경유하거나 활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18세기 이후 강대국 패권 경쟁의 핵오랫동안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울릉도는 독도와 더불어 18세기 후반부터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과 연동돼 항로 문제, 군사적 가치, 자원 문제 등으로 전략적인 가치가 커졌다. 1787년에는 프랑스가 울릉도를 ‘다줄레섬’으로, 1849년에는 독도를 ‘리앙쿠르’로 명명했고, 러시아와 영국도 독도를 자기 식으로 불렀다.
이제 동해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조우하는 현장이 됐다.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 항로상의 경유지였고, 중핵이라는 상징성이 컸다. 당연히 러시아와 급성장한 일본은 사할린, 조선에 대한 영향권과 자원의 확보, 동아시아 주도권을 놓고 충돌을 시작했다.
일본은 울릉도에서 목재를 수입하는 데 실패하자 밀반출을 시도했고, 조선 정부는 1885년 목재 반환을 요청했다. 한편 러시아는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인 율 이바노비치 브리너가 세운 ‘조선삼림회사’를 통해 1896년 울릉도의 목재 채벌권을 따냈다. 결국 1904년 2월 4일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울릉도와 독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했던 일본은 울릉도 해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선언했다.
옛 우산국의 영역에서 일본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미국까지 가세해 영향력을 확장했었다(윤명철, 《우산국, 울릉도와 독도의 나라》).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 기억해주세요
우산국은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이었을 것이다.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던 우산국을 복속한 이후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