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 확산하던 지난 9월 중순. 명품업체 버버리가 런던 외곽의 한적한 숲에서 ‘2021 봄·여름 컬렉션’을 공개했다. 런웨이에는 모델만 있을 뿐 관객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 온라인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에 패션쇼를 내보냈다. 고객은 제품이 마음에 들면 온라인으로 바로 구매할 수 있었다. 그동안 명품 패션쇼는 소수 부유층만을 위한 것이란 인식이 많았는데, 버버리가 명품업계 처음으로 ‘방구석 랜선 패션쇼’를 연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로 각종 컬렉션과 패션쇼가 줄줄이 취소되던 때여서 큰 관심을 모았다.
과거 명성에 젖어 있던 버버리가 달라졌다. 1856년 설립돼 전통만을 고집하던 버버리가 전례 없는 행보를 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위기는 오히려 버버리가 사업을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구습을 벗어던졌고, 디지털 전환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으며,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부모님 세대 브랜드’라는 고루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에도 나서고 있다. 실적은 개선되고 있다. 혁신과 변화를 주도하는 이는 마르코 고베티 최고경영자(CEO)다. “위기는 곧 기회”…절치부심
버버리는 올 3분기 7억3707만유로(약 97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애널리스트들은 3분기 매출이 2분기보다 12%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6% 감소에 그치며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과 한국, 미국 등에서 매출이 두 자릿수 증가를 기록한 덕분이라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영국 캐슬퍼드에 있는 생산공장은 최근 가동을 정상화했다. 안전한 작업환경을 위해 자체적인 방역 조치를 취했으며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제도 도입했다. 고베티 CEO는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 선전하면서 더디긴 하지만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며 “밀레니얼 세대 등 신규 고객이 유입되고 버버리 브랜드에 대한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나 고무돼 있다”고 했다. 명품 전문매체 징데일리는 “버버리가 글로벌 명품업체 중 선두에서 코로나19 충격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다”며 “버버리에 최악의 상황은 끝난 것 같아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난여름 고베티 CEO는 명품업체로선 처음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코로나19로 세계 매장의 60% 이상이 문을 닫았던 터였다.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하던 중국 등 아시아 관광객의 발길은 끊겼고, 2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5% 급감했다. 세계 직원의 5%를 해고했고 생산과 유통, 재고 등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1억9500만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절감했다. 기존 공식을 과감히 깨다
다른 한편으론 디지털 전환 작업에 힘을 쏟았다. 손님이 매장에 찾아오기를 기다리던 과거 폐쇄적인 접근법을 벗어던졌다. 젊은 소비자를 새로 끌어들이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전폭적으로 활용했다. 신제품은 가장 먼저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직원들을 동원해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컬렉션의 화보를 셀피처럼 찍는 등 비대면 방식으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작해 바이럴 마케팅도 펼쳤다. ‘내 친구가 든 버버리백’ 같은 친근한 느낌을 줘 밀레니얼 세대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코로나19로 세계 기업들이 움츠린 상황이었지만 버버리는 투자에 주저하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최대 시장인 중국에 주력했다. 상반기 중국에 9개 매장을 새로 열었고 중국의 대표적 정보기술(IT) 대기업 텐센트의 인기 게임인 ‘아너오브킹스’와 협업하기도 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체크 무늬와 트렌치 코트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접목한 다양한 제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에코백 같은 질감으로 만든 단순한 디자인의 포켓백은 인기를 끌고 있다. 샤넬과 루이비통 등 다른 명품업체가 가격을 인상한 것과는 반대로 버버리는 대대적인 할인 행사까지 진행했다.
고베티 CEO는 명품업체들이 눈독을 들이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손대는 브랜드마다 이미지 변신에 성공해 전성기를 누렸다. 트렌드를 읽는 본능적인 감각과 과감한 시도, 신속한 의사결정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그는 195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국 워싱턴DC의 아메리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선더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 1984년 보테가베네타의 광고감독으로 명품업계에 첫발을 들인 뒤 승승장구했다. 1989년 발렉스트라에 임원으로 합류했으며 1993년부터 2004년까지 모스키노 CEO를, 이후 지방시 CEO를 맡아 당시 디자이너였던 리카르도 티시와 함께 지방시를 부활시켰다. 2008년부터는 셀린느 CEO로 전성기를 이끌었고 버버리엔 2017년 합류해 티시를 최고크리에이티브책임자(CCO)로 다시 불러들였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