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우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훌훌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윤동주 <눈 오는 지도>
이 시와 같이 ‘떠난다’라는 말이 직접 나오면 우리는 시인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를 감상할 때 중요한 것이 시적 상황인데, 우리는 이 시에서 어렵지 않게 이별이라는 시적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가는’ 또한 이별을 알려주는 시어이다. 그뿐이랴! ‘아무도 없다’, 즉 부재의 의미를 갖는 시구나, ‘잃어버린’, 즉 상실의 의미를 갖는 시어에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사별이니, 부재(不在)니, 상실이니, 결핍(缺乏)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이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시인은 친절하게도 이별의 상황을 알려주는 시어들을 여기저기 배치해 놨다.
이별이라는 시적 상황을 말하고 있는 시의 경우 슬픔의 정서를 어느 부분에서 드러냈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이 시에 ‘슬픈’이라는 시어가 직접 사용된 것이 또다시 고맙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나 정서를 직접 말하기만 한다면 독자들은 시인에게 감사할지언정 감탄 또는 감동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알 듯 모를 듯한 시어나 소재로 감춰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 시에서 ‘말 못할 마음’은 슬픔을 대신하는 알 듯 모를 듯한 시어이다. 말을 못할 지경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이별이라는 시적 상황에서 그 의미는 결국 슬픔이다. 이뿐만 아니다. 시인은 ‘함박눈’이라는 소재를 통해 슬픔의 정서를 감춰 놨다. ‘말 못할 마음으로 … 나려’, ‘슬픈 것처럼 … 덮인다’고 한 ‘함박눈’에서 독자는 그렇게 한 시인의 의도를 간파하고 ‘함박눈’에서 슬픔의 정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요인을 떠올려야 한다. 가는 곳을 몰라…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따라갈 수도 없다만약 떠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이 시에서도 시적 화자는 ‘순이’를 사랑하기에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안타까워하는데, 그 안타까움이 얼마나 큰지, ‘어느’라는 시어를 반복하고, ‘거리-마을-지붕 밑’과 같이 점점 범위와 크기가 작아지는 시어들을 나열하며(점강법을 사용하며)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 안타까운 마음이 물음의 형식, 즉 의문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눈이 나린다’. ‘간다’, ‘남아 있다’보다는 ‘눈이 나리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남아 있는 것이냐’가 더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의문문을 활용한 효과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물리적 공간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 또한 물리적 공간에서는 ‘따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순이가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눈’ 때문이다.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 가고 싶어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즉 ‘눈’은 만남을 방해하는, 단절하게 만드는 장애물로서, 슬픔의 원인이 된다. 눈이 자꾸 나려…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눈이 나리리라인간사에서 상황은 늘 변한다. 이 시에서도 그런 변화가 드러나 있다. ‘눈이 자꾸 나’리는 현재 상황에서 시적 화자는 불행하다. 그런데 그 ‘눈이 녹으면’ 상황은 바뀐다. 슬픔 또는 장애물이 걷히고, 만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아직 오지 않았기에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시적 화자는 그 희망을 품고 ‘발자욱을 찾아 나’설 것이라 한다.
그런데 진짜 만날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다. 만날 때까지는 아직 슬픔 속에 있게 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라고 말한다. 희망이 없다면 포기하기 때문에 슬픔은 곧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희망을 품은 상태에서는 포기를 모르기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슬픔 속에 있게 된다. 그래서 그랬을까? 시적 화자는 하루도 아니라 ‘일 년 열두 달 하냥 … 눈이 나리리라’고 한다. ‘일 년 열두 달’이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수치가 슬픔과 방해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끼게 한다. 역사처럼이 시를 한 남자가 한 여인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만남을 위한 희망을 품으며 찾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다. 그런데 이 시에서 ‘역사처럼’이라는 시어가 예사롭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저항하다 옥사했던 윤동주의 비극적인 삶이 오버랩되면 더욱 그렇다. 이때 이 시는 개인적 경험을 역사적 상황으로 확장해서 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적 화자가 찾고자 하는 ‘순이’는 당시 윤동주의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인 결국 우리 민족일 것이다. 그런 ‘순이’가 떠난 것처럼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다. 그래서 내리는 ‘함박눈’이 ‘슬픈 것처럼’ 느껴지고, ‘하얗게’ 방안이 보인다. ‘순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조국의 광복도 아득하다. 찾고자 하나 ‘눈이 자꾸 나려 따라갈 수도 없’는 것처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민족 해방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나 ‘순이’를 만나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조국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언젠가는 ‘꽃이 피’는 것처럼 조국 광복도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그때까지는 슬픔을 안고, 일제의 온갖 탄압을 받으며 윤동주는 살아갔던 것이다. ☞ 포인트
① 이별의 상황을 파악하고 슬픔의 정서를 느껴보자.
② 만남의 장애에 대한 시적 화자의 정서와 태도를 살펴보자.
③ 일제 강점기에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산 윤동주의 생애를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