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다녀와서 실손의료보험금을 청구할 때면 ‘여기가 정보기술(IT) 강국 맞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일일이 서류를 떼고 보험사에 보내는 것, 바쁜 사회인에겐 꽤나 귀찮은 일이다. 2년 전 한국갤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실손보험 가입자 중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데도 청구하지 않은 사람이 47.5%였다. ‘금액이 적어서’(73.3%·복수응답) ‘시간이 없어서’(44.0%) ‘서류 챙기기가 귀찮아서’(30.7%) 같은 이유가 많았다.
실손보험금 청구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한 입법 시도가 또 가로막혔다. 지난 2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고용진·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등이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을 논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법안소위는 만장일치 관행이 있어 몇몇 의원만 반대해도 처리가 막힌다. 이들 법안은 실손 가입자가 요청하면 의료기관이 보험금을 전산으로 바로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회 관계자는 “야당 간사와 일부 여당 의원까지 이견을 보였다”며 “상임위 배정이 바뀌는 21대 국회 후반기에나 법안이 다시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법안소위 통과 저지에 총력을 쏟은 의료계 전략이 먹혀든 결과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은 지난달 수차례 국회를 찾아 정무위 의원들을 만났다. 그는 “보험회사가 원하는 대로 환자 정보를 들여다보고 악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료계의 속내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실손보험 자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비급여 진료 내역 등까지 들여다볼 것을 우려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실손 청구 간소화는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제도 개선을 권고한 이후 11년 묵은 사안이다. 20대 국회에서 비슷한 입법이 추진됐지만 무산됐다. 21대 국회 들어 여야가 같은 법안을 내놓으면서 합의 처리 기대감이 고조됐지만 역시나였다. 이번에 발의된 법안은 심평원이 서류 전송 외 다른 목적으로 정보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의료계의 입장을 고려한 조항을 넣었는데도 이렇게 됐다.
시민단체들은 소비자 편의 증진을 위해 청구 간소화를 꾸준히 요구해왔다. 금융위도 “한국 같은 IT 강국에서 아직도 종이서류를 제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보험업계도 몇 년 전부터 실손 청구 간소화에 적극 찬성으로 돌아섰다. 보험금 지급은 다소 늘겠지만 단순 반복 업무에 드는 비용이 더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
정부가 원하고, 소비자가 원하고, 심지어 보험사도 원하는 정책이 의사들 논리에 막혀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180석의 힘’을 이런 곳에 썼다면 큰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