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닥, 상장 유지하려면 성소수자 등 임원시켜야?"[조재길의 지금 뉴욕에선]

입력 2020-12-02 08:00
수정 2020-12-19 00:31
3300여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상장돼 있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나스닥이 새로운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앞으로 새로 상장하거나, 기존 업체들이 상장 자격을 유지하려면 꼭 지켜야 하는 가이드라인입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승인을 받아 내년부터 시행에 나설 계획입니다.

핵심은 소수자 배려입니다. 나스닥 상장사라면 이사진에 여성과 성소수자 등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죠.

새 규정에 따르면, 기업들은 최소 두 명의 이사를 소수자 계층에서 선임해야 합니다. 한 명은 여성으로 하고, 다른 한 명은 성소수자 또는 소수 인종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죠. 성소수자는 흔히 얘기하는 LGBT로, 레즈비언 게이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의미합니다.

예외적으로 외국 기업이나 소규모 기업이라면 이사진 중 소수계층 몫(2명)을 모두 여성으로 채워도 되지만, 대다수 기업은 위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나스닥은 상장 회사들이 이사진 내 다양성 통계를 필수 공개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가이드라인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퇴출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스닥은 이런 내용의 지침을 SEC에 제출했지요.

글로벌 증권거래소 중에서 이런 파격적인 지침을 내놓은 것은 나스닥이 처음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내 주요 기업의 이사진이 백인 남성 일색으로 채워진 데 따른 조치”라고 분석했습니다.

이와 함께 성소수자 배려 등을 강조하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의 정책 방향에 보조를 맞추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나스닥이 지난 6개월 간 조사한 결과 상장 기업의 4분의 3이 새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여성 임원을 한 명이라도 둔 곳은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두 번째의 ‘성소수자 또는 소수인종’ 조건을 맞추지 못했지요.

SEC가 나스닥 가이드라인을 승인할 경우 전체의 80% 가까운 기업들에 비상이 걸리게 되는 겁니다. 상장사 중 2500여 곳은 성소수자나 소수인종을 찾아 임원으로 승진시켜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나스닥은 SEC 승인 후 기업들이 1년 내 이사회의 다양성 통계부터 공개하도록 할 방침입니다.

2017년 1월 주요 거래소 중 최초로 여성으로서 나스닥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아데나 프리드먼은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 및 재무 성과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SEC가 나스닥의 새 규정을 승인할 지는 불투명합니다. 최소 수 개월 간 공론화 과정을 거칠 것이란 게 월가의 관측입니다. 다만 바이든 신임 대통령은 다양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 결정을 주도할 SEC의 새 수장 역시 나스닥의 새 가이드라인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임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반대 목소리도 일각에선 나옵니다.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죠. 또 능력자보다 소수자를 앞세우라는 건 또 다른 차별이란 논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자 배려’에 방점을 찍는 건 돌이킬 수 없는 글로벌 트렌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올해 초 “기업 이사진에 최소 한 명의 소수자를 포함하지 않을 경우 기업공개(IPO) 업무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은행은 내년엔 이 기준을 두 명으로 올릴 계획이죠.

한국 산업계에서도 이젠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제법 많습니다. 이런 새 트렌드는 한국 기업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얼마 전까지 간접 규제 정도로 생각했던 ‘환경·사회·지배구조(ESG)’가 핵심 경영 트렌드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