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로 불리던 무선호출기는 1990년대 대표적인 통신 수단이었다. 1982년 처음 국내에 소개된 후 1997년 가입자가 1500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세 명 중 한 명꼴로 삐삐를 소유했던 셈이다. 하지만 전성기는 짧았다. 이듬해 휴대폰이 통신요금 인하 바람을 타고 급속도로 대중화하면서 삐삐의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1년 만에 가입자가 3분의 1로 줄었고 그다음 해부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그랬던 무선호출기가 부활에 성공했다. 카페와 식당에서 기다림 문화를 바꾸는 진동기로 변신해 다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삐삐에서 진동기로 모양과 이름은 바뀌었지만 ‘연결’이라는 핵심 기능은 변함이 없다.
경기 부천에 있는 중소기업 리텍의 이종철 대표가 변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1990년대 한 중견그룹 개발자였던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로 직장을 잃은 뒤 1998년 리텍을 창업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사업을 한다는 일념에 사명과 브랜드 모두 성(姓)과 테크놀로지를 합친 ‘리텍’으로 했다.
이 대표는 아웃백과 베니건스 등 패밀리레스토랑 개척에 성공하며 자신감을 얻은 뒤 카페로 눈을 돌렸다. 지금은 커피빈과 투썸플레이스를 비롯해 국내 대부분 유명 카페 브랜드가 리텍 제품을 쓴다. 그는 “종업원은 큰 소리로 손님을 부르고 손님은 무작정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데 모두 공감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진동기는 단순히 순서를 알려주는 기계에서 광고를 싣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유튜브를 비롯한 멀티미디어에 대한 수요를 반영하기 위해 호출기에 영상 광고를 넣고 싶어하는 고객이 적잖다”는 설명이다. 리텍은 창업 21년 만인 지난해 국내 고객사를 2만여 곳으로 늘리며 약 1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또 다른 중소기업 엔티티웍스의 브랜드 씨스콜은 테이블 벨 분야의 숨은 강자다. 식당 등의 테이블마다 설치돼 있는 테이블 벨은 고객이 직원을 부르는 데 쓰이는 제품이다. 진동기와 마찬가지로 무선호출기 기능이 내장돼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1990년대 설립 이후 30여년간 호출기 한우물을 팠다”며 “지난해 매출은 100억원을 살짝 넘는다”고 말했다. 후발주자인 중소기업 큐필드도 링크맨이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진동기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무선호출기업계는 카페와 식당에 이어 병원, 은행 등 새 시장 개척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종철 리텍 대표는 “진동기를 쓰면 ‘딩동’ 하는 소리 자체가 없어 조용히 기다리는 문화가 가능하다”며 “성형외과처럼 고객이 신분 노출을 꺼리는 병원에서도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
자동차와 가전 등 주로 대기업이 운영하는 사후관리(AS)센터도 주요 고객으로 떠오르고 있다. 은행은 VIP 고객이 많은 곳 위주로 진동기 사용이 늘어나는 추세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