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주(州) 출신 저술가 빌 브라이슨은 아이오와에선 어디서든 건물 옥상에 오르면 시야 끝까지 펼쳐진 옥수수밭을 볼 수 있다고 묘사했다. 광활한 대평원과 함께 그는 ‘아이오와에선 대부분의 여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살이 쪘다’고도 그렸다. 싸구려 패스트푸드에 의존하는 저소득층이 많은 현실을 빗댄 것이다.
미국 동부와 중서부의 오하이오, 웨스트버지니아, 일리노이, 미시간, 위스콘신 등의 주들은 흔히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불린다.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된 지역경제를 녹이 슨 공장 설비에 비유한 용어다. 이들 지역 주요 도시에선 창문이 깨진 채 늘어선 상점, 굳게 잠긴 공장, 버려진 주택가 등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유적’을 쉽게 볼 수 있다.
‘오만 가지 불행의 중심지’로 불리는 이들 지역에서 일자리를 잃은 저학력 백인들은 빈곤과 이혼, 가정폭력, 마약중독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사할 돈이 없어 러스트 벨트를 떠나지도 못하는 그들은 ‘힐빌리(촌뜨기)’나 ‘레드넥(목둘레가 햇볕에 빨갛게 탄 것을 놀리는 말)’, ‘화이트 트래시(백인 쓰레기)’로 불리며 조롱당했다.
그러나 소외된 삶을 이어가던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미국 정치의 향배를 바꾸는 주역이 됐다.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 참여했던 상퀼로트(무산층)나 지주 타도에 앞장섰던 1940년대 중국 농민들처럼 이들은 강고했던 미국 정치지형에 균열을 냈다. ‘샴페인 좌파’의 위선과 이중성을 혐오했던 힐빌리들이 공고했던 민주당 지지 기반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불만을 동물적 감각으로 읽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와 일자리 창출을 내걸어 집권에 성공했다.
우리식 표현으론 ‘흙수저’ ‘가재·붕어·개구리’ ‘성 밖 사람들’에 해당될 힐빌리의 삶은 오하이오 출신 변호사인 J D 밴스가 2016년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라는 저서를 펴내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마침내 미국 백인 소외계층의 ‘애가(哀歌)’가 영화화됐다는 소식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신파조로 흐르거나 흔한 성공담으로 마무리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담담하게 소외된 이들의 삶을 그렸다는 평이다. ‘힐빌리의 노래’가 전하는 메시지는 양극화가 심해지는 한국에도 바다 건너 일만은 아닐 듯하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