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회사 대주주 측 감사 선임을 어렵게 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앞두고 자회사를 합병해 자진 상장폐지를 추진하는 기업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자회사의 감사 자리를 허무하게 행동주의 펀드에 내주느니 차라리 합병해 상폐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식의 자진 상폐가 확산될 경우 증시에도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상법 개정되면 기업들 감사 자리 못지켜2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타이어그룹의 지주회사인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전지사업 자회사인 한국아트라스BX를 흡수합병하기로 했다. 양사는 내년 1월 각각 주주총회를 열고 4월 1일까지 합병을 마무리할 방침이다. 합병이 완료되면 코스닥시장 소속인 아트라스BX의 상장은 자동으로 폐지된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측은 “시너지 극대화를 통해 사업환경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합병을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에선 상법 개정안에 앞서 한국타이어그룹이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트라스BX는 2016년부터 행동주의 펀드인 밸류파트너스(지분율 1.4%) 등 소액주주 진영과 갈등을 빚어왔다. 밸류파트너스는 현금성 자산이 많아 ‘알짜기업’으로 꼽히는 아트라스BX에 배당 증대 등을 요구하면서 2018년 주총 때부터 사측이 제안한 사외이사들의 감사위원 선임 안건을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결국 아트라스BX는 3년 연속 주총에서 감사위원 선임에 실패했다. 현 감사위원 3명은 이미 임기가 만료됐으나 법원 결정을 통해 새로운 감사위원이 선임될 때까지 감사위원직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아트라스BX 감사 자리를 소액주주 측에 내줘야 할 가능성이 높다. 현행 상법은 감사위원을 사외이사 등 이사회 멤버 중에서 선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외이사인 감사위원을 선임하는 경우 대주주를 포함한 모든 주주의 의결권은 각각 3%로 제한(3%룰)되지만 대주주가 추천한 사외이사 중에서 선출되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다. 상법이 개정되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상법 개정안에는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 중 1인 이상을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출(감사위원 분리 선출)하고, 이 과정에서 대주주 측 의결권은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을 합산해 3%로 제한(3%룰 강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대주주 측 지분율이 아무리 높더라도 감사위원인 사외이사를 선출할 때 의결권은 3%까지만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감사위원은 기업의 영업활동에 대한 조사권, 각종 서류와 회계장부 요구권 등을 갖고 이사회에서 주요 경영사항을 결정한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에 앞서 지난 10일 GS리테일이 GS홈쇼핑을 흡수합병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GS홈쇼핑은 과거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SC펀더멘털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자진 상폐 합병 도미노전문가들은 상법이 개정되면 이처럼 상장 자회사를 합병하는 방식으로 자진 상폐를 시도하는 기업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 자회사 감사위원에 행동주의 펀드 등 소액주주를 대변하는 사외이사가 선임될 경우 그룹 전체 경영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대기업 상당수가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감사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며 “대기업들의 합병 자문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고 전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자회사가 소액주주 이익을 위해 움직이다 보면 모회사와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일이 많아지게 될 것”이라며 “일본에서는 이런 문제를 의식해 아예 자회사를 합병하는 등 상장폐지한 기업이 올해만 15개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게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와 다중대표소송제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상법 개정안처럼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3%룰은 적용하고 있지 않다.
자회사 합병을 통한 상장폐지가 급증할 경우 주식시장에 큰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합병 과정에서 합병비율 산정 등을 둘러싼 주주가치 훼손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아트라스BX와 GS홈쇼핑 일부 소액주주들은 합병 결정에 대해 “주주들의 이해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처사”라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오형주/조진형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