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절반 이상을 알로 채우는 도루묵은 초겨울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동해 해안가에 알을 대량으로 낳는다. 산란처는 해조류다. 그런데 해양오염이 심해지면서 해조류가 줄고, 이에 따라 그대로 방사돼 떠돌던 도루묵 알이 해안가에 무더기로 쌓여 썩어가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국내 연구진이 이 같은 ‘바다 쓰레기’를 뒤져 연구해 천연 항암제 등 유용한 성분을 확보했다.
임영운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은 동·서·남해에서 산업적, 의학적으로 유용한 기능을 가진 새로운 해양균류(해양 곰팡이) 150여 종을 발견했다고 27일 밝혔다. 해양 곰팡이는 해양 플랑크톤이나 해양 세균(박테리아)과 다른 성장형 생물군이다.
연구팀은 제주도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한 ‘페니실륨 제주엔세’를 비롯해 52종의 새로운 해양 곰팡이와 100여 종의 미기록종(다른 나라에서 발표됐으나 국내에선 처음 발견된 종)을 찾아냈다. 동·서·남해를 대표하는 우점종은 페니실륨(푸른곰팡이), 클라도스포륨, 트리코데르마, 아스페르길루스 등으로 나타났다.
임 교수는 “동·서·남해와 제주 해역의 해수, 갯벌, 해변, 해조류 및 기타 여러 해양생물로부터 해양 곰팡이 581종(2만6321개 세부 균주)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알려진 해양 곰팡이가 1500여 종임을 감안하면 3분의 1 이상을 확보한 의미 있는 성과다. 특히 서해와 남해 갯벌에서는 페니실륨이 다량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페니실륨은 천연 항생물질(페니실린) 원료 등에 사용되는 고부가가치 자원이다.
연구팀은 해안에 쌓인 바다 쓰레기에서 플라스틱 등 난분해성 물질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곰팡이를 확보한 것을 또 다른 성과로 꼽았다. 부패한 도루묵 알, 중국에서 밀려와 해변에 쌓인 불청객 해조류 ‘괭생이모자반’ 등에서 유용한 곰팡이를 추출했다. 도루묵 알에선 페니실륨을 비롯해 파라덴드리피엘라, 클라도스포륨, 푸사륨 등 184종을 분리했다. 이들은 대체로 셀룰로스 분해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셀룰로스는 목재, 의류, 필름, 종이 등의 원료로 쓰이는 물질이다. 바다에 버려진 폐플라스틱에선 곰팡이 123종을 분리해냈다. 이 중 절반가량은 플라스틱 분해 활성이 높았다.
임 교수는 “해파리, 녹조류 등에서 분리한 해양 곰팡이로부터 암, 동맥경화 등을 예방하는 항산화 물질을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많이 보고됐으나, 한국에선 그동안 연구가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고야의정서 등의 영향으로 각국 글로벌 제약, 농업, 화학 업체들은 배타적인 생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이번에 확보한 곰팡이들로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가 이끄는 연구실은 해양수산부로부터 ‘해양균류자원은행(MFRB: 해양균류자원 기탁등록보존기관)’으로 7년 전 지정됐다. 대학, 연구소와 기업 연구자들은 MFRB가 보유한 곰팡이를 신청만 하면 쉽게 분양받을 수 있다. 김재진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는 임 교수가 처음 발견한 ‘아스리니움 코리아눔’에서 난소암 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겐티실알코올’을 추출해 항암제를 개발하고 있다. 한국화학연구원은 MFRB에서 분양받은 균주를 토대로 유기농 친환경 농약을 개발해 특허를 등록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