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6년 만에 '지옥 시드전' 통과한 배경은 "가족에 숨기고 출전, 사고 쳤어요"

입력 2020-11-26 17:47
수정 2020-11-26 23:52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의 또 다른 이름은 ‘화수분 투어’다. 하루가 멀다하고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탄생한다. 그런 투어에서 ‘지옥의 라운드’로 불리는 게 시드 순위전이다. 1년간의 뜨거웠던 시즌을 거친 뒤라 선수들의 기량이 최고조에 달한 데다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독기까지 품고 경기를 치르기 때문이다. 은퇴한 지 6년이 넘은 배경은(35·사진)이 이 시드전에 도전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던 배경이다. 배경은은 모두의 생각을 깼고, 스스로 ‘불가능은 없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본선 최종 결과 31위.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대다수 경기를 뛸 수 있는 사실상의 풀시드 확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든 베테랑의 귀환이 성사된 것이다.

그는 26일 “사실 (출전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저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아버지도 기사를 보고 제가 시드전에 나갔다는 걸 아셨어요. 매너리즘에 빠지기 싫어서 도전해본 건데 결과가 이렇게 좋을 줄은 저도 몰랐고요. 제대로 사고를 친 거죠.”

배경은은 2014년 은퇴하기 전까지 투어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하나였다. KLPGA투어 통산 3승을 올렸고, 2005년에는 상금왕도 차지했다. 172㎝의 훤칠한 키에 미소가 맑은 그는 대회 때마다 팬들을 몰고 다녔다. 240~250야드를 넘나드는 장타와 자로 잰듯한 아이언 샷이 이번 시드전에서도 빛났다는 후문이다. 비거리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 후배들에게 견줘도 평균 이상이다. 그는 “심리적 부담이 그리 크지 않아서 그런지 경기가 편안하게 풀렸다”고 했다.

은퇴 후 골프 방송 리포터, 레슨 프로 등으로 산 제2의 인생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했다.

“필드는 떠났지만 열정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은퇴 후에 골프가 더 좋아지고 왠지 실력도 좋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더라고요. 또 리포터를 하면서도 후배들 곁을 맴돌다 보니 대회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렇다고 초청 선수로 나가면 후배들 자리를 뺏는 게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대로 실력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죠.”

오히려 후배들의 응원이 자신감을 심어줬다. KLPGA투어 최고참 후배 홍란(34)의 격려가 컸다. “(홍)란이가 ‘언니, 그 정도 치면 지금도 충분히 투어에서 뛸 수 있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덕분에 내년에는 제가 투어 최고령 선수가 됐네요. 호호.”

출전권까지 확보한 이상 배경은은 다음해를 ‘아름다운 도전’으로만 끝내진 않겠다는 각오다. 샷감도 괜찮다.

“아이언은 옛날부터 자신 있었고요. 지금은 실수 폭이 더 줄어든 것 같아요. 내년에 30개 대회가 열린다면 절반인 15개 대회 정도에 출전하려고요. 꼭 ‘노익장’을 과시해서 후배들에게도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