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문구 파라다이스

입력 2020-11-26 17:39
수정 2020-11-27 01:50

스마트폰에 일정을 적고 태블릿PC로 그림을 그린다. 메모도 전자펜으로 한다. 웬만한 건 다 디지털기기로 해결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노트에 손글씨로 일정과 할 일을 적는 사람들이 있다. 연필을 깎아 쓰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오래전 생산된 연필을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온라인 경매로 옛날 연필 한 자루를 10만원 넘게 주고 구입한다. 말 그대로 ‘문구 덕후’들이다.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御宅)’의 한국식 표현인 ‘오덕후’를 줄인 말이다. 뭔가 하나에 몰두하는 사람을 말한다. 오타쿠가 집안에 틀어박혀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부정적 인식이 있는 것과 달리, 덕후는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 지식을 가졌다는 긍정적 의미로 쓰인다.

덕후들은 그만큼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문구 덕후들은 “그래도 문구라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다른 아이템에 비해 돈이 덜 들어 다행이라는 그들만의 공감대다.

문구에 관한 책을 펴낸 김규림 작가는 어릴 적엔 용돈의 대부분을, 요즘도 수입의 절반을 문구를 사는 데 쓰고 있다. 김 작가는 “문구는 사라져버리는 것을 손에 잡히는 것으로 붙잡아 두는 보편적 도구”라며 “문구 구입에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문구 브랜드 아날로그키퍼의 문경연 대표는 문구 덕후였다가 아예 창업한 케이스다. 그는 “안 팔리면 내가 다 쓰겠다”는 생각으로 2018년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아날로그키퍼가 만든 다이어리는 한 번에 5000권씩 찍어도 모자랄 정도의 인기 제품이 됐다. 덕후들이 덕후의 장인 정신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문구’ 해시태그를 단 게시글이 102만 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가 붙은 글이 163만 개다. 인기 가수인 ‘#아이유’ 게시글(91만여 개)보다 많다. Z세대로 불리는 1020세대는 자신이 그린 캐릭터로 노트, 볼펜, 스티커 등을 직접 디자인해 제작하는 1인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기도 한다.

문구 기획전 ‘다꾸페’(다이어리 꾸미기 페스티벌)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개인 사업자도 늘고 있다. 서울 충무로, 을지로 등에 오래전부터 자리잡은 인쇄소들이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기 시작하면서 누구나 쉽게 문구를 제작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지털의 발달이 아날로그산업을 발전시키는 모습이랄까.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문구 덕질에 입문한 사람도 늘었다. ‘문구 덕후’의 전성시대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