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에서 불바는 자신의 아들이 부족을 배신하자 “내가 너에게 생명을 줬으니 이제 너의 생명을 거두겠다”며 아들을 처형한다. 이것은 전쟁 상황에서 지휘관의 권한이었겠지만 부족의 전통적 문화나 관념과도 연관돼 있을 것이다. 부족 또는 가족 내부의 소위 ‘명예살인’은 일부 지역에서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
인간이 타인 생명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오늘날 사형제도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세계적인 흐름은 대체로 사형제도 반대로 옮겨가고 있다. 그런데 비자의적인 존엄사와 관련해서는 이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많은 국가에서 입법 등을 통해 무의미한 생명유지 의료의 중단을 허용하고 있으며, 가족이나 보호자만이 아니라 병원의 윤리위원회 등에 그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심지어 윤리위원회 등이 보호자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생치료금지(DNR) 처방을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서 불가역적 혼수상태에 빠진 테리 샤이보를 두고 남편은 치료 중단을, 부모는 치료 지속을 원해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대통령까지 개입하는 긴 과정을 거쳐 치료 중단 판결이 났다. 가족 간 의견이 불일치했던 사례다. 영국의 샬럿은 조산아로 태어났는데 뇌 손상과 지속적인 고통을 겪고 있으며 회복할 가능성도 없었다. 의료진은 샬럿에 대한 지속적 치료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고통의 연장에 불과하다며 호흡이나 심장박동이 멈출 경우 소생 치료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봤다. 영국 법원은 부모의 격렬한 반대 속에 의료진 손을 들어줬다. 의료진의 의견이 가족의 의견을 압도한 사례다.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관해 몇 차례 법원의 선구적 판단이 있은 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을 입법해 올해 4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법은 환자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환자의 법정 대리인이나 가족 전체의 동의와 전문의의 확인을 받아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하도록 정하고 있다. 환자 의사가 확인되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그에 따르며 그 확인 방법도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자기의 생명에 대해 원칙적으로 자기결정권을 갖는 것일까? 연명의료 중단은 본인이 원하더라도 제한적 조건하에서 허용된다. 또 사람의 촉탁이나 승낙을 받아 사람을 살해하거나 사람을 교사 또는 방조해 자살하게 하는 행위는 형법상 범죄로 처벌한다. 즉 자기의 생명이라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원칙이다.
한편, 착상된 아기는 모체의 일부라는 측면과 점차 독립한 생명체로 완성해가는 인격체로서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임신 중지와 관련해 여성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견해와 생명을 중시하는 견해가 오랫동안 대립해 왔다. 인간의 생명은 언제부터 독립한 인간으로서 가치를 갖는가. 수정되는 순간 이미 생명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견해는 극단적이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시험관시술 등 불임시술에 관련된 법적 위험은 감당하기 어렵다.
형법은 낙태죄를 처벌하며, 모자보건법은 임신 24주 이내 낙태를 일정한 조건하에 허용한다. 낙태죄의 위헌성은 오랫동안 다퉈져 왔는데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자기낙태와 의사의 촉탁승낙 낙태에 대해 처벌하는 형법 규정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한편 이 결정은 세계보건기구 의견을 반영해 임신 22주 이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중 14주 이내의 임신중지는 보다 광범위하게 허용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이 포함돼 있다.
스티븐 래빗의 《괴짜경제학》은 미국에서 어느 시점부터 범죄율이 급격히 감소한 원인을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에서 찾고 있다. 임신중지가 허용됨으로써 여성 본인은 물론 태어날 아기의 삶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개별적 사안에서 그런 인과관계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 변화에 대한 거시적 관찰에 따른 이런 가설의 제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을 깊이 고민한 뒤 내린 전인적(全人的) 결정이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