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와 출혈 경쟁 등 위기에 직면한 기업들이 사업 영역 넓히고 새 먹거리를 발굴하고자 사명 변경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기존 주력 분야에 올인(All-In) 하기보단 기업 정체성을 확장시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시도라는 분석이다. 기아차, SK텔레콤 주력 업종 빼고 심플하게
21일 업계에 따르면 기아자동차는 사명에서 '자동차'를 빼고 '기아'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아차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다각도로 검토 중"이라고 사실상 사명 변경을 인정했다.
기아차가 사명 변경을 추진하는 이유는 자동차 제조업체라는 이미지를 벗고 미래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아차는 엠블럼 변경도 추진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 출시 예정인 3세대 K7에 처음 적용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기아차는 현 송호성 사장 체제로 바뀌기 직전인 지난 2월 박한우 당시 기아차 사장이 엠블럼 교체 등 브랜드 혁신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사명 변경도 이 과정의 연장선인 것으로 보인다.
'탈통신'을 선언한 SK텔레콤은 종합 AI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사명에서 과감히 '텔레콤'을 빼는 걸 추진하고 있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이 지난 1월 국제가전제품박람회(CES)에서 말했던 사명 변경 작업이 최근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의 새 이름은 'T스퀘어'(Square)가 유력한 후보로 올렸다가 일본의 퓨전 재즈그룹 'T-Square' 그룹명과 동일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후 후보로 오른 이름은 'SK투모로우', 'SK하이퍼커넥트', '티모'가 거론됐다.
박정호 사장은 SK이노베이션처럼 사업 간 경계를 완전히 허문 느낌의 사명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호 사장은 최근 사내 타운홀미팅에서도 "사명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뭐든 같이 고민을 해보자"고 언급했다. 사명에서 '텔레콤'을 빼겠다는 의지를 전 직원들에게 공표한 셈이다. 사명 변경하며 사업 영역 확대 꾀해
게임업계에서는 엔씨소프트의 사명 변경에 이목이 집중된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9월 '엔씨'로 상호 변경을 위한 가등기를 서울중앙지법에 신청했다. 가등기는 미래에 진행될 본등기에 앞서 상호를 확보해 놓기 위한 예비 조치로, 엔씨소프트가 본업인 게임을 넘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려는 신호로 읽힌다.
그동안 김택진 대표의 행보를 살펴보면 사명 변경은 예정된 수순이란 평가다. 김택진 대표는 '국내 대표 게임사'라는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 다각화에 전력을 쏟고 있다. 김택진 대표의 부인인 윤송이 엔씨소프트 사장 주도로 2011년 인공지능(AI) 연구조직이 만들어진 뒤 2018년에 AI 야구정보앱 '페이지'가 탄생했다.
지난 4월에는 머신러닝 기반으로 날씨와 기사 등을 스스로 작성하는 'AI 기자'를 상용화했다. 지난 7월엔 엔터테인먼트 자회사 '클렙'을 만들어 친동생인 김택헌 엔씨소프트 수석부사장을 앉혔고 지난달에는 KB증권과 손잡고 'AI 간편투자 증권사 합작법인'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식품업계에선 던킨과 도미노스의 사명 변경이 두드러진다. 던킨은 지난 1월 사명에서 도넛을 뺀 '던킨'(Dunkin)으로 공식 BI를 변경했다. 던킨 관계자는 "도넛 브랜드라는 기존 이미지를 벗고 브랜드 확장을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실제로 던킨 매출의 60%는 도넛이 아닌 커피와 음료에서 발생하고 있다.
도미노피자는 지난해 2월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으로 '라이프 푸드, 도미노스'(Life food, Domino's)를 발표하고 사명을 도미노스로 바꿨다. 피자 단일 카테고리를 벗어나 상품군 확장을 각인시키려는 의도다.
한국타이어는 지난해 3월 사명에 '테크놀로지'를 추가해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로 바꾸는 안건을 승인했다. 같은달 지주회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도 이날 주총에서 사명을 '한국테크놀로지그룹'으로 바꾸는 안건을 승인하고 타이어를 뺐다.
한국타이어그룹의 사명 변경은 한국타이어제조이던 사명을 1999년 현재의 사명으로 바꾼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성장성이 정체된 타이어 한 가지에 주력하기보단 미래 먹거리를 적극 발굴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앞으로는 심플한 사명이 대세"
업계 관계자는 "단순하고 짧은 이름이 디지털 시대에 적합하다"며 "PC·노트북 컴퓨터보다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면서 상대적으로 작은 화면에서도 쉽게 인식되는 간결한 이름의 효용성이 더욱 높아졌고 기업의 사업 확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 와튼 스쿨 칼 울리히(Ulrich) 교수는 "(영어 이름의 경우) 알파벳 문자 10개 이상이면 인터넷 트래픽이 평균 7% 떨어지며 문자가 하나 더해질 때마다 추가로 2%씩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알파벳 문자 7개 이하 짧은 이름이 기업에 이상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정희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브랜드명에 업종을 붙이면서 홍보를 했다"며 "이제는 굳이 업종을 붙이지 않아도 소비자들이 다 알고 있을뿐더러 오히려 진부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앞으로는 심플한 사명이 대세"라고 분석했다.
이어 "업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한 가지 정체성만 담은 사명은 사업 확장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있다"며 "전통보다는 미래를 보려는 시도도 보이고,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시대에 맞는 기업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좋은 시도"라고 평가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