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반 교역은 고위험·고수익 벤처사업이었다

입력 2020-11-23 09:00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진나라가 있었다. 진시황이 통일한 중국의 진나라와 중국인들이 대진국으로 불렀던 로마제국이다. 대진국은 ‘서쪽의 커다란 진나라’를 가리켰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는 서로 상대방이 뛰어난 문물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사막, 산맥, 협곡, 강, 초원 등 건널 수 없는 지리적 장벽과 호전적인 유목 민족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방대한 자연 장애물을 넘어 1만㎞ 이상을 걸어서 그 길을 오간 사람들이 바로 카라반이다. 카라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낙타다. 낙타는 등에 혹이 하나인 더운 사막지대의 단봉낙타와 혹이 둘인 아시아 초원지대의 쌍봉낙타가 있다. 단봉낙타는 안장과 같은 하우다를 얹어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었고, 쌍봉낙타는 짐 싣는 데 주로 이용됐다. 낙타 한 마리가 100~200㎏의 짐을 싣고 하루에 50~60㎞를 갔다.

낙타가 가축화된 것은 BC 2500년께다. 인간이 사막지대로 진출하면서 낙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낙타는 온순하고 수명이 길어 30~40년은 산다. 긴 눈썹과 코 근육으로 눈과 코를 막아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다. 또 물과 먹이가 없어도 혹에 저장된 지방을 분해해 오래 버틸 수 있다. 사막에 최적화된 낙타는 카라반에게 컨테이너 트럭과도 같았다. 그러나 낙타로 운반할 수 있는 물품은 한정됐다. 낙타 100마리에 짐을 가득 실어도 비잔티움시대의 배 한 척이 실을 수 있는 짐의 10분의 1도 안 됐다. 카라반의 영화도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자연히 사라졌다. 근대에 들어서자 교역로 곳곳이 두절돼 잊힌 길이 됐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길이 된다카라반이 오고 간 실크로드는 정확히 언제 형성됐는지 알 수 없다. 실크로드라는 명칭도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명명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라반이 가끔 다니는 길이 있었을 뿐이다. 먼저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된 상거래가 점차 사막지대로 확대되고, 사막에 점점이 박힌 오아시스 도시 간의 교역이 긴 선처럼 이어졌다. 이 선이 다시 초원지대의 다양한 유목민과 연결됐다.

중앙아시아에는 넘기 힘든 장애물 두 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타클라마칸사막과 톈산산맥이다. 실크로드는 2대 장애물에서 네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만난다. 만년설이 있는 톈산산맥을 중심으로 한 톈산 북로와 톈산 남로, ‘붉은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산맥을 돌아가는 서역 북도와 서역 남도가 그것이다. 이 길들은 시안, 둔황을 거쳐 투르판 또는 카슈가르로 갈라졌다가 대도시인 사라르칸트, 부하라로 다시 모였다. 여기서 다시 바그다드를 거쳐 팔미라에 집결한 뒤 지중해 연안 항구에서 배를 이용해 종착지인 로마제국과 이집트로 퍼져나갔다.

실크로드 외에도 동서 교통로로 초원길과 바닷길이 있다. 초원길은 만리장성 너머 몽골고원, 알타이산맥, 카스피해를 거쳐 흑해 북안으로 이르는 길이다. 이 초원길을 따라 흉노 돌궐 몽골 등 유목 민족이 흙바람을 일으키며 유럽의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바닷길은 계절풍을 이용한 연안 항해 방식으로 이집트나 페르시아에서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을 거쳐 중국 남부를 이었다. 바닷길은 이슬람 상인들이 주도했는데, 중국 도자기가 많이 거래돼 ‘세라믹로드’라고도 불린다. 종교·문화·이야기를 전파한 길인류 역사를 보면 희소성과 수요·공급이 있으면 어디서든, 어떻게든 교역이 이뤄졌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중국의 비단을 선호했고, 중국 황실은 로마의 유리를 최상품으로 여겼다. 금과 같은 귀금속은 동서양 공통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행기나 자동차로 실어 나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카라반을 통한 육상 교역로가 형성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카라반은 실크로드를 통해 귀금속, 약재, 향신료 등 부피가 작으면서 값이 비싼 각 지역의 특산품을 공급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는 시안이었지만, 서역의 산물은 신라에까지 들어왔다. 로마의 유리그릇 20여 점이 4~6세기 신라 고분인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에서 부장품으로 발견됐다.

동서 교역로는 비단과 유리, 귀금속만 전한 게 아니다. 중동과 서아시아에서 발흥한 종교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방으로 전파됐다. 소그드인은 진귀한 상품과 함께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을 전했다. 경교로 불린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들어왔다.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띠처럼 전파된 것도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서다.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였던 사마르칸트의 7세기경 벽화에는 왕국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한 외국 사절단 가운데 새 깃털 장식의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 두 명이 그려져 있다. 중국의 발명품인 종이가 서역에 전해진 것도 실크로드를 통해서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과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전투는 제지 기술이 전파된 계기였다. 화약, 나침반도 실크로드로 전파됐다. 화약은 중세 이후 전쟁 양상을 바꿨고, 나침반은 15세기 대항해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됐다.

카라반은 한 번 출발하면 보통 가는 데만 2~3년이 걸렸다. 한낮 사막의 더위를 피해 밤에 별을 길잡이 삼아 줄지어 걸어가는 카라반 행렬은 낭만적인 풍경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무수한 위험과 죽을 고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위험할수록 수익도 높은 법이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해 서역의 물건을 풀어놓고, 동방의 진기한 물품을 모아 귀환하면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카라반은 고대의 벤처사업이요, 고수익 위험 자본이었던 셈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① 로마인이나 당나라 사람도 있었지만 카라반의 주축이 중동 아라비아 사람이었던 이유는 왜일까.

② 옛날에도 활발한 대외교류를 하는 개방형 경제가 한 나라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폐쇄형 경제보다 성장에 유리했을까.

③ 로마의 유리그릇이 신라에 전파된 것처럼 신라를 포함한 삼국시대 사람들이 서양으로 진출했다면 지금 한국인의 역사는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