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종주의 체제와 우리를 연관짓는 모든 시도를 마음을 어지럽히는 부당한 도덕적 모욕으로 여긴다. 이 사회에서 백인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암시하기만 해도 대개 일군의 방어적 반응을 보인다. 분노, 두려움, 죄책감 같은 감정과 논쟁하기, 침묵하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에서 벗어나기 같은 행동이 포함된다. 우리 백인은 이런 반응으로 도전을 물리쳐 균형을 회복하고, 인종적 편안함을 되찾고, 인종 위계에서의 우위를 유지한다. 나는 이 과정을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으로 개념화한다.”
미국의 인종담론 연구자 로빈 디앤젤로 워싱턴대 교수는《백인의 취약성》에서 이같이 말한다. 저자는 여러 인종의 ‘샐러드 볼’ 형태인 미국에서 백인이 자신의 인종 위치에 대한 도전을 받을 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모든 방어적 반응을 ‘백인의 취약성’이라 정의한다. 저자가 고안한 이 단어는 옥스퍼드 사전에서 2017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됐다. 하지만 미국에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의 정체성은 줄곧 비슷했다. 백인, 남성, 상층계급 또는 중간계급, 비장애인이었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자라는 백인은 사회화를 통해 백인 우월주의를 내면화하고, 그에 따른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저자는 20년 넘게 ‘인종 다양성 훈련사’로서 기업이나 학교, 시민단체 등 다양한 현장에서 인종주의 체제 관련 교육을 하면서 백인들의 예민한 반응을 관찰했다. “나는 백인이며 이 책에서 백인의 집단역학을 다룬다”고 밝힌다. 자신이 정의한 백인의 취약성을 바탕으로 풍부한 경험과 사례를 들어 미국의 인종주의를 분석한다. 또 “백인의 취약성은 인종 통제의 강력한 형태”라고 덧붙인다.
이 책에 따르면 ‘백인’이라는 용어는 1600년대 말 미국 식민지법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국은 1790년께 인구조사에서 사람들에게 각자의 인종을 말하라고 요구했다. 1825년께 이른바 ‘혈통의 등급’에 따라 누구를 인디언으로 분류할지 결정했다. 1800년대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옴에 따라 미국에서 백인 인종 개념은 더욱 공고해졌다.
저자는 “백인은 인종과 관련한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인 ‘인종 체력’을 기르지 않은 채 자라게 된다”며 “결국 인종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마치 무릎반사처럼 발끈하며 백인의 취약성으로 대응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기 위해 유색인종을 이용하는 현실도 꼬집는다. 저자는 “열등한 흑인종을 따로 만들어내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백인종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흑인성은 백인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밀레니얼 세대도 백인의 취약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백인 밀레니얼 세대의 41%가 정부가 소수집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48%가 백인에 대한 차별이 유색인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2018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2년 넘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을 지키고 있다. 지난 5월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 이후 인종주의 논쟁의 중심에 서며 아마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한때 백인들에게 ‘별점 테러’를 당하면서 백인의 취약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2016년과 올해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백인 지지자들 다수가 인종차별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백인이 백인의 취약성이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고 독려한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