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 '늑장 공시'로 손실, 13억 배상"

입력 2020-11-19 17:47
수정 2020-11-19 21:38

2016년 한미약품의 ‘공시 지연’으로 손실을 본 투자자들에게 회사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기업의 공시 의무를 엄격하게 본 것으로, 법원은 투자자들이 요구한 금액의 99%를 인용했다. 그해 11월 사건이 접수된 지 4년 만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6부(부장판사 임기환)는 김모씨 등 투자자 120여 명이 한미약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19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청구금액 13억8000여만원 중 13억7000여만원을 한미약품이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사건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미약품은 2016년 9월 29일 주식시장 마감 후 오후 4시33분 1조원대 항암제 기술을 글로벌 제약업체에 수출했다고 공시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30일 오전 9시29분께 8500억원대 또 다른 기술수출 계약이 파기됐다는 악재성 공시도 냈다. 전날 대비 5.5% 오른 가격으로 출발한 한미약품의 주가는 18.1% 폭락한 채 거래를 마쳤다. 이에 소액주주들은 “한미약품은 30일 개장 전에 악재성 뉴스를 공시해야 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의 쟁점은 투자자 보호를 위한 기업의 공시 의무 범위를 어디까지로 해석할지였다. 법원은 기업의 공시 의무를 엄격하게 판단했다. 재판부는 “기업공시제도는 증권 내용과 발행회사의 재산 및 경영상태 등 투자자에게 필요한 내용을 신속, 정확히 공시함으로써 투자자가 회사의 실태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하는 제도”라며 “이는 증권 거래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 악재가 2016년 9월 29일 오후 7시6분께 통보됐는데 한미약품은 거래소 측과 문제가 있어 다음날 거래 개시 후 공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악재를 거래 개시 전에 공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보이지 않으므로 한미약품은 원고(소액주주)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에는 한미약품 공시 지연 사건과 관련된 손해배상 소송이 두 건 더 있다. 소송 참여자는 370여 명이고 청구금액은 44억여원에 달한다.

법조계에선 이날 선고가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원고들을 대리한 윤제선 법무법인 창천 변호사는 “기업의 입맛에 맞춰서 공시 시점을 조율하던 관행에 철퇴를 가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며 “이 선고를 토대로 추가로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검찰은 한미약품 공시지연 사건과 관련해 2016년 12월 한미약품의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임원 황모씨 등을 구속기소했다. 이들은 악재성 정보를 미리 알고 관련 주식을 팔아 총 33억원가량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공시 지연에 대해선 공시 문구 등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고 회사 측 고의는 없었다며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이 사태로 당시 한미약품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김재식 부사장은 사표를 내기도 했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공시 지연에 대해서는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결론이 난 사안인데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며 “즉각 항소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