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최근 부동산시장 과열 양상에 대해 한은 탓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통화정책 수단 일부를 정부에 넘기고 돈만 풀라는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집값 과열도 한은 탓?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3일 최근 전세난이 임대차법 때문이 아니냐는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저금리 때문”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세계 주요 10개국에서 유동성 증가와 집값 상승을 비교한 결과 한국의 유동성 증가율은 세계 주요국 가운데 최하위권으로 집계됐다. 반면 집값 상승률은 세계 최상위권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올 9월 말 시중 통화량(M2·원계열)은 3132조3008억원으로 지난해 말에 비해 7.51%로 나타났다. 유동성 증가율은 세계 10대 주요국 가운데 9위였다. 미국(21.9%)의 유동성 증가율이 가장 높았고, 호주(12.39%) 브라질(11.59%) 남아공(11.22%) 러시아(9.74%) 인도네시아(9.61%) 멕시코(8.96%)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보다 유동성 증가율이 낮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했으며 5.82%였다.
반면 올 상반기 기준 집값이 가장 많이 뛴 곳은 서울과 모스크바로 5%대를 기록했다. 글로벌 부동산컨설팅업체 세빌스에 따르면 세계 주요국 도시 28곳 가운데 서울과 모스크바의 집값이 5%대로 가장 상승률이 높았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주택난이 심해진 것은 유동성보다는 정책 실패에 더 무게를 뒀다. 정책목표 흔들고, 권한 빼가려는 시도도 국회에서는 한은 정책목표를 흔들어대고 있다. 여야가 최근 한국은행법 제1조 개정안을 내놓고 한은과 협의에 들어갔다.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한은 목표에 고용안정을 추가로 집어넣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적잖은 통화정책 전문가들은 고용안정을 새로 넣으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적이다. 통화정책의 다른 목표인 금융안정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가령 요즘처럼 저물가에 고용이 부진한 상황에서는 경기 부양을 위해서는 금리를 내리는 등 완화적 통화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가 자칫 과열 양상인 집값을 더 자극할 수 있어 금융안정이라는 목표가 일부 희생될 수 있다.
한국 고용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가운데 통화정책으로 고용안정이라는 목표를 얼마나 실효성 있게 달성하지도 미지수다. 한국은 작년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평가 ‘노동시장 유연성’ 부문에서 141개국 중 97위를 기록하는 등 노동시장 주요 지표가 세계 최하위권이다.
한은이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도 부족하다. 고용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할 수단이 기준금리 조절 밖에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권이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이면에는 한은이 시중에 유동성을 대거 공급하라는 압박이 담겨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종의 '금융 포퓰리즘'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은의 몇 없는 권한마저 빼가려는 시도도 나온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을 통해 금융결제원 관리 권한를 비롯한 지급결제제도를 운영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금융결제원 관리와 지급결제제도를 운영하는 한은이 강력 반발하고 있지만 금융위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금융위의 개정안 추진은 금융결제원 원장 자리를 자기 사람으로 채우기 위한 계산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관피아(관료+마피아)'를 위한 자리를 더 마련하겠다는 의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한은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권한이 줄어들면 그만큼 통화정책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뒤틀린 통화정책의 청구서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 한은 내부에서는 이처럼 사면초가에 몰린 것은 주요 현안에 대해 숨거나 제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결과라는 성찰론도 나온다. 한 한은 관계자는 "적잖은 기획재정부 출신이 국회의원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포진하며 기재부 권한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며 "반면 한은은 국회의원은커녕 본인의 영역인 금융결제원 수장 자리도 내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요 현안과 한은의 권한을 둘러싸고 국회와 정부에 강단있게 주장하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