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언제나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 그러면 정책의 합리성과 일관성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나? 그간 우리나라는 관료제의 집단적 경험과 제도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텨 왔다. 관료제는 정치권의 지시와 요구에 적당히 대처하면서, 그리고 또 나름대로 진화해 왔다. 문제는 진화의 방향이 국리민복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데 있다. 권한, 예산, 조직, 규제를 늘려 권한을 팽창시켰다. 책임을 회피하고 민간에 전가하는 제도와 관례를 개발했다. 국민의 고충과 어려움은 악성 민원으로 환원시켰다. 대통령과 정치권의 까다롭고 과격한 요구는 고개를 낮추고 적당한 선에서 수용했다. 그 과정에서 집단적 이익을 쉬이 확보하곤 했다.
정치에 대한 관료제의 대항력(對抗力)을 기대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했다. 첫째, 정부 권한이 극도로 확대됐다. 과거에는 정부가 들여다보지 않던 일, 개인과 기업의 근원적인 경제·소비 활동, 안전, 보건, 개인정보보호 등에 정부가 간섭하고 있다. 둘째, 사회의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정책에 대한 이해관계자의 폭이 확대됐다. 다양한 의견 표출로 인해 정책의 복잡성이 커지고 있다. 셋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사안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화학물질, 디지털 의료, 원자력, 바이오,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어떤 정책적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책에 따라 산업 경쟁력도 치명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여차하면 국가 경쟁력이 뚝뚝 떨어질 판이다.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에 대한 감사 결과 보고서는 관료제의 한계와 타락을 한눈에 보여준다. 어딘가 저 높은 곳에서부터 원자력발전 담당관까지 폐쇄 결정은 일사불란했다. 관료제는 나름의 경험과 지식이 있었을 텐데도 저항하지 않았다. 매년 1조5000억원 이상 매출을 5년간 예상했기에 5925억원을 들여 9년간 보수한 원전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정부에 5652억원에 달하는 즉시 폐쇄 비용 보전을 거론했지만, 산업통상자원부는 그 요구의 시도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
경제성 평가라는 과정 자체가 존재했던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이는 한수원 이사회의 주주에 대한 책임이라는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본시장의 규율과 제도가 경제성 평가를 요구한 것이다. 또 경제성 평가를 담당한 회계법인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법과 해석에 따라 직무를 수행했고 상당히 높은 경제성을 보고했다.
발전량에 대한 원전의 한계비용은 0에 수렴하므로, 기존 발전소의 운용 경제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 당연한 결과를 뒤집기 위한 관료들의 노력이 보고서에 영화처럼 나열돼 있다. 개념을 왜곡하고, 기준을 망가뜨리고, 정반대 가정들을 부끄러움 없이 강요했다. 계속 가동했을 때 현금 순수입의 현재 가치가 애초 보고서에서는 2772억원이었는데, 한 달 만에 -91억원으로 수정됐다. 회계법인은 발주자의 요구에 순응했지만, 기록을 남겼다. 정치와 행정부의 폭주를 관료제가 아니라 민간의 규율과 제도가 대항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가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슈에 대한 관료들의 전문성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졌다. 정치적 압박이 있는 경우 저항하지 않는 생존기법에 통달해 있다. 그러면 사회적 관심이 높은 이슈와 문제를 어떻게 결정해야 하나? 전문가의 직업적 전문성에 입각해야 한다. 그나마 자본시장과 국제적 회계관례의 규율 및 제도가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학습할 수 있다.
전문가는 그렇게 쉽게 정치나 관료의 압박에 순응하지 않는다. 전문성에 맞게 결정하고 다시 자신의 전문가 세계로 돌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정책 의사 결정의 핵심적인 과정에 다양한 전문가 풀의 심층적인 자문과 활발한 협의가 필요하다. 전문가적 판단이 핵심 단계 각각의 이정표가 되도록 정책 결정 과정을 재설계해야 한다. 이에 필요한 시간적, 재정적 자원도 여유 있게 배정돼야 한다. 변동성이 심한 복잡한 현대사회에선 모두가 전문가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방법에 능통해야 한다. 차원 높은 고급 고용자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