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산업의 국제 협의체 중 가장 오래된 협회가 국제주물산업협회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6년에 협회가 조직됐으니 5년 뒤인 2025년이면 출범 100주년을 맞는다.
모래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틀에 금속 소재를 부어 특정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주물 기술 자체의 연원도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청동기 시대는 대략 기원전 2000~1500년.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는 기술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이 주물이 전기차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부터 부품업체까지 여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국내에서 '뿌리산업'으로 지정되며 국가적인 지원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주물과 테슬라의 공정 혁신
올해 8월 일론 머스크는 흥미로운 내용을 자신의 SNS로 알렸다. 모델Y 제작을 위해 독일 공장에 사상 최대의 주물 기기를 들였다는 것이다.
로이터 등 외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을 종합하면 테슬라는 신차 뒷부분을 주물로 뽑아낸 하나의 알루미늄 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원래 70개 이상의 부품을 조립해 만들던 부분이다.
테슬라 뿐 아니라 모든 완성차 업체는 여러 금속판을 용접해 붙이는 등의 방식으로 차체를 만든다. 이렇게 하면 충돌시 차량이 자연스럽게 접히며 운전자에게 전달되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알루미늄 소재 및 설계 혁신을 통해 기존 차체의 충격 감소 효과와 공정 단순화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특정 배합으로 완성한 알루미늄 혼합물을 금형에 주입해 차체를 만든 뒤 이를 로봇이 뽑아내는 공법이다.
이 과정에서 독일 공장에서 차체 조립을 위해 사용되던 수백대의 제조 로봇은 주물 기기 하나로 대체된다. 이탈리아 제조업체에서 만들고 있는 주물기기는 왠만한 집 크기일 정도로 크다.
테슬라는 연구개발을 통해 차량 앞부분과 중간 부분도 각각 주물로 제작한다는 계획이다. 차량 차체를 이루던 수백개의 부품이 주물로 찍어낸 금속판 2~3개로 교체되는 것이다. 경량화, 열 전도율 개선도 주물로차체 뿐만이 아니다. 전기차 전환을 준비하는 차량 부품업체들에게 주물 기술은 생존을 결정 짓는 관건이 되고 있다.
엔진 및 변속기 관련 부품을 생산하는 우수AMS는 최근 주조 관련 자회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모터 등 전기차 부품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다.
우수AMS의 김선우 대표의 이야기다.
"차량 구동계 관련 기술을 이야기하면 금속 정밀 가공을 떠올리지만 소재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주물을 통해 어떻게 소재 경쟁력을 높이느냐가 품질을 좌우한다.
전기차로 넘어오면서 차량 부품 숫자가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의 2분의 1, 3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게 부품 숫자가 줄어들면 각 부품의 품질이 차량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다.
배터리 무게를 당장 줄이기 힘든 가운데 전기차를 경량화하는 것은 다른 금속 부품의 무게다. 이 무게를 줄이면서 강도도 강화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 핵심이 주물이다.
주물 과정에서 금속을 어떤 비율로 배합하고 잘 섞어 뽑아낼 수 있는지가 부품 하나하나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중국이 전기차를 일찍부터 만들고 있지만 이 부분은 해결을 못하고 있다.
아직은 중국 대비 기술 경쟁력이 있는 주물 기술에 더욱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다. 국가적인 지원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전기차 배터리 케이스를 만드는 덕양산업은 다른 이유로 주물 관련 기술을 강화하고 있다. 케이스의 열 전도성이 얼마나 높은지가 전기차 주행 품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전기차는 주행 과정에 모터와 배터리에서 적지 않은 열이 발생한다. 이를 바깥으로 빨리 배출하려면 케이스 등의 열 전도성이 높아야 한다. 얼마나 열 전도성이 높은 금속화합물로 배터리 케이스를 만들 수 있는지가 제품 경쟁력을 결정짓는 이유다.
이영철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박사는 "알루미늄 함량을 높이면 열 전도율이 올라가지만 그만큼 주물로 찍어내기 어렵다는 문제가 생긴다"며 "둘 사이에서 균형을 찾거나 가공 기술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천덕꾸러기에서 핵심 기술로 사실 주물산업은 아직도 국내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2007년부터 신규 설비 투자가 막힌 수도권 최대의 주물기업 밀집지역, 인천 경인주물단지가 대표적인 예다.
1970년대부터 있었던 단지지만 인근에 청라신도시 등이 들어오며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 공정 특성상 악취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곳의 주물기업들은 신규 설비투자를 해서는 안되고 혹시나 폐업하는 주물공장이 주변에 있더라도 사들여 설비를 가동해서는 안된다.
지자체도, 인근 주민들도 주물기업들이 고사하기는 기다리는 것이다. 이같은 어려움에 관련 업체들은 충남 예산에 땅을 사들여 이전하는 것을 검토했지만 그마저도 무산됐다. 이전 예정지 주변의 농민들이 반발하면서 충남도청 등이 당초 방침을 수정해 이들 기업들을 받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주물기업들은 여건만 보장되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경남 진해에서 밀양으로 이전하는 팔미금속의 이언수 부사장은 “중국에도 공장이 있는데 주물 1㎏의 생산단가가 1800원으로 한국의 1650원보다 비싸다”며 “끊임없는 생산성 향상을 통해 중국보다 높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주물산업”이라고 말했다.
국내 주물 생산량의 절반은 자동차 부품으로 사용된다. 나머지 중 상당 부분은 전자부품이다. 전기차 시대에도 한국이 뒤쳐지지 않으려면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할 산업이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