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수출 대란'…정부 발바닥 땀나게 뛴다

입력 2020-11-12 16:22
수정 2020-11-12 16:25


LG화학은 최근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전기자동차 배터리 셀을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를 통해 유럽으로 보내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모스크바를 거쳐 독일 베를린에 도착하기까지 2주가 걸린다. 해상운임이 급등한 데다 유럽으로 가는 배를 구하는 게 어려워지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한 방법이다.

정부가 이처럼 배를 구하지 못해 '수출 대란'을 겪는 기업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국적해운선사인 HMM(舊 현대상선) 등 선사들과의 협의를 통해 당장 운송이 시급한 화물은 어떻게든 실을 자리를 마련하고, 더 높은 값을 받기 위해 기존 계약을 파기하는 횡포를 적극 단속하는 식이다. 정부는 현재 71만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 수준인 HMM 선복량을 2025년까지 112만TEU 수준까지 늘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계획이다. 정부 해운재건 '대박'났지만…
해운산업을 설명하는 유명한 문구 중 하나는 '궁핍과 잔치의 산업(Industry of poverty and feast)'이다. 불황으로 인한 궁핍은 비교적 오랜 기간 이어진다. 망하는 선사도 속출한다. 그러나 호황기에는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큰 '잔치'가 벌어진다. 20세기 해운업을 주름잡았던 선박왕 애리스토틀 오나시스도 이렇게 돈을 벌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1956년 수에즈 운하 봉쇄였다. 해운 운임이 천정부지로 뛰었고, 6개월간 현재 가치로 1조7000억원(당시 8000만달러)에 달하는 '대박'을 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해운업계에는 여기에 버금가는 호재였다. 글로벌 해운사들은 코로나19 사태 초기 불황에 대비해 운항 선박을 크게 줄였다. 그런데 물동량은 예상만큼 줄지 않았다. 수요가 크게 감소하지 않은 상황에서 컨테이너를 실을 선박 부족이 심해지니 운임이 치솟았다. 2018년 정부로부터 3조1000억원의 유동성을 지원받아 국내 조선사들에 20척의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하고, 올해 이를 모두 인도받은 HMM은 '대박'이 났다.

하지만 반대로 수출 기업들이 운임 상승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정부는 고심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촘촘한 무역 규제 등을 피해 기업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한정돼 있다. 정부는 당초 해운 운임을 예산으로 일부 지원하거나 융자해주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WTO가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했다"며 문제삼을 수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정부가 시장에 함부로 개입해 운임을 억지로 낮출 수도 없다. 해외 선사는 물론 국적 선사에게도 이런 요구는 어불성설이다. 당장 "그럼 운임이 낮아지면 정부가 보전해 줄 것이냐"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라서다. 해외 주요 기관 등은 내년 1분기 이후 운임이 다시 내려갈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로이드 리스트는 지난달 "현재의 운임 수준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급증한 것이며, 조만간 조정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세계적인 해운항만 컨설팅사인 드류어리도 3분기 보고서를 통해 "2021년 해상운임은 부분적으로 하향이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몇 없는 카드, 정부가 던진 '묘수'
이런 가운데서도 정부는 연일 수출대란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핵심은 정부가 "어차피 망할 기업에 왜 혈세를 동원하느냐"는 비판을 감내하며 살려낸 HMM이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물동량이 적은 HMM의 동남아항로 투입 선박을 미주항로에 재배치해 4000~5000TEU급 선박을 매월 한 척 이상 추가 투입키로 했다. 이 같은 계획에 대해 해운업계는 "생각보다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부산항의 월 수출입 물량(6만~7만TEU)의 10% 가까운 물동량을 정부가 추가로 제공해서다. 중소기업 여건상 회차당 선복량이 5TEU를 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조치로 매주 70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수출에 숨통을 틀 전망이다.

정부는 또 HMM(옛 현대상선)을 통해 제품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들에 연말까지 선적 공간을 우선 배정하기로 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대기업은 그나마 웃돈을 얹어 주면 화물을 실을 공간을 구할 수라도 있지만, 중소기업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며 "애초에 화물 양이 적어 해운사 입장에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이에 따라 계약을 파기하는 사례 등도 속출하고 있다"고 했다. SM상선도 다음달부터 내년 1월까지 미주항로에 3000TEU급 임시선박 한 척을 투입할 계획이다.

해수부는 또 머스크 등 해외 선사에게도 일방적인 계약 파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최근 해상운임이 상승하자 일부 외국 선사들이 화주와의 기존 장기계약을 준수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진해운만 있었더라면"…해수부, 장기 대책 수립한다전문가들은 한진해운이 파산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수출 대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지난 9월 기준 한국발(發) 미국 수출 물동량은 전년 동기 대비 1만TEU 늘었다. 현재 국적선사의 미주항로 주당 공급량은 한진해운 파산 이전인 2017년 2월 주당 공급량(4만6000TEU)보다 낮은 4만1000TEU 수준인데, 한진해운 파산 이전의 공급량을 유지했다면 지금보다 월 2만TEU가량을 추가로 운송할 수 있다. 한진해운 파산이 지금 시점에서 못내 아쉬운 이유다.

정부는 해운사와 화주(화물의 주인)간 장기적인 신뢰 관계가 구축돼야 한진해운 파산 및 수출 대란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해운사가 '슈퍼 갑(甲)'이지만, 언제든 해운 운임이 떨어지면 해운사들의 수익성이 급전직하할 수 있어서다. 해수부 관계자는 "해운 물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화주와 해운사 모두 안정적인 경영활동이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수부는 이를 위해 국적선사 적취율(국내 화주가 국적선사에 화물을 맡기는 비율)을 지난해 기준 31.3%에서 한진해운 파산 이전(34%)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복안이다. 이를 위해 국적선사와 장기계약을 맺는 화주에게는 법인세 및 항만시설사용료 감면을 지금보다 늘리고, 정책금융 금리도 깎아주기로 했다.

해수부는 또 한진해운 파산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기 위해 HMM의 선복량을 2025년 112만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내놨다. 금융지원을 통해 컨테이너선 발주를 더욱 늘리겠다는 것이다. 계획이 실행되면 국내 해운업체들의 선복량은 2017년 2월 한진해운 파산 직전(105만TEU)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2020년 말 끝나는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단의 HMM 공동경영관리도 정부의 원활한 지원을 위해 연장을 추진키로 했다.

정부는 HMM 외 국내 해운업 전반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 동남아항로 선복량을 지난해 20만TEU 수준에서 2022년 25만TEU 수준으로 확대하기 위해 국적선사들에 선박금융 및 경영자금을 지원하고, 선사·조선사·공공기관 등이 참여하는 선주사도 2022년 설립키로 했다.

해수부 관계자는 "화주 및 조선사 등 선박 금융 참여자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선화주가 상생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계속 추가 대책을 발굴해 수출 기업들을 돕겠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