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RI 목표는 글로벌 AI 강국…기술 싸움꾼 1000명 키울 것"

입력 2020-11-11 17:17
수정 2020-11-12 02:08
“인공지능(AI) 하면 보통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떠올리는데, 단편적 생각입니다. 초고속 통신 네트워크, 고성능 컴퓨팅이 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AI 연구기관으로 탈바꿈시킨 김명준 원장(사진)이 11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ETRI는 한국이 ‘통신 강국’으로 올라서는 데 초석을 놓은 정부출연연구소다. 1980년대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전전자교환기(TDX)를 국산화하고, 1990년대 2세대 이동통신(CDMA) 상용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민간 통신기업, 소프트웨어(SW) 업체들이 약진하면서 기관 입지가 좁아졌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 원장은 “집(기관)을 수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 지었다”며 “앞으로 모든 산업 분야에 AI를 더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4월 부임한 김 원장이 지켜본 ETRI의 상태는 마치 모래알 같았다. 통신, SW 등 개발 인력들이 600여 개 과제를 저마다 따로 연구하고 있었다. 김 원장은 “2000여 명의 직원이 30년 전 포맷 그대로 일하고 있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해 조직 개편에 나섰다. 젊은 직원들을 모아 향후 기관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의견을 폭넓게 들었다. 각개약진하던 600여 개 과제는 키워드별로 재분류했다. 그 결과 △슈퍼컴퓨팅·지능형 반도체 등을 개발하는 인공지능연구소 △전파·위성·방송기술 등을 다루는 통신미디어연구소 △안전·의료·에너지 등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개발(R&D)을 하는 지능화융합연구소 △양자컴퓨팅 등 미래 기술을 개발하는 ICT창의연구소 등 네 골격으로 기관을 재편했다.

그러나 중견 이상 직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한 사내 세미나에선 김 원장이 AI 연구기관으로 전환 방향을 설명하자 참석자 절반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김 원장은 AI의 본질을 설파하면서 직원들을 계속 다독였다. “이세돌 9단이 구글 AI 알파고와 대국한 곳은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이 아니다. 해저 광케이블로 연결된 초고속 통신, 텐서플로(TPU) 48개를 장착한 슈퍼컴퓨터와 전 세계 데이터센터가 연결된 가상공간이다. AI는 좁은 의미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잘하는 통신을 기반으로 모든 기술이 융합된 새 패러다임이다.”

사내 컨센서스가 조금씩 이뤄지자 김 원장은 KT, LG유플러스, 현대자동차, 한화 등 대기업 임원들을 잇따라 만나면서 AI 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2월엔 KT, 현대중공업그룹, KAIST 등과 함께 선도형 AI 기술을 개발하자며 ‘AI 원팀’을 결성했다. 12일엔 두산그룹과 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다른 출연연구소와 공동 프로젝트도 확대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하늘을 나는 자동차’인 도심항공모빌리티(UAM), 한국형 위성항법시스템(KPS) 공동 개발에 나섰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는 플랜트 배관 누출 사고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AI 기술을 최근 선보였다. SK텔레콤과 함께 개발한 40테라플롭스(1초에 40조 번 연산)급 초저전력 AI 반도체 ‘알데바란’, 국내 AI 선도기업 솔트룩스와 함께 개발한 딥러닝 엔진 ‘엑소브레인’ 등도 고도화하고 있다.

김 원장은 “ETRI 직원 2000여 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대형 매트릭스(행렬), 미적분 방정식을 풀 수 있는 AI 엔지니어”라며 “이들을 세계 속의 ‘기술 싸움꾼’으로 키우면 제2의 TDX, CDMA 신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5월 ‘사내 AI 대학원’을 설립했다. 김 원장이 일일이 교육 콘텐츠를 챙기고 있는 이 대학원은 파이선, 고급딥러닝, 고급수학, 강화학습, 인지·뇌과학, 시각·언어지능 심화 등 폭넓은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대전=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