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법관을 '장기판 卒'로 보는 巨與, 알아서 눕는 법원

입력 2020-11-06 17:31
수정 2020-11-07 00:04
대법관은 헌법재판관과 함께 우리 사회의 정의와 공통의 가치, 준거 규범의 최종 수호자다. 판결을 통해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현인(賢人)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그런 대법관의 권위가 존중받기는커녕 무시·폄하되면 국가의 존립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릴 위험이 커진다.

이런 점에서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그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대법관인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에게 “‘의원님들, (예산을) 한번 살려주십시오’ 한번 하세요”라고 한 것은 갑질 수준을 넘어 우리 사회의 근본을 스스로 허무는, 해서는 안 될 망언이었다. 판사 출신인 박 의원은 법원의 ‘법고을 LX’(판결문 데이터베이스) 사업 예산이 지난해 3000만원에서 전액 삭감된 것을 언급하며, 조 처장에게 ‘읍소’하라고 이런 훈수를 둔 것이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언행은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해온 국민을 욕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여권 핵심 인사들의 안하무인(眼下無人)식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박 의원의 언행은 사법부를 바라보는 여권의 시각을 은연중 드러낸 것으로 비친다. 대법관을 ‘장기판 졸(卒)’쯤으로 여기는 꼴이다. 이 지경이 된 데는 사법부 스스로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다. 엄정하고 불편부당한 판결을 통해 스스로 권위를 세우고 지켜야 할 법원이 최근 정치적 고려를 한 듯한 판례를 자주 내놓고 있어서다. 대법원부터 전교조 법외노조 무효, 이재명·은수미 판결 등 하급심 판결을 해괴한 논리로 판판이 뒤엎으면서 신뢰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어제 김경수 경남지사의 2심(서울고등법원)에선 2017년 대선 당시 댓글 조작 의혹과 관련해 드루킹에게 센다이 총영사직을 제안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 “선거법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는 무죄 판결까지 나왔다. 후보가 특정되지 않아 선거법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인데,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댓글 프로그램으로 여론을 조작한 혐의는 징역 2년의 유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에선 또 어떤 판단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이렇다보니 많은 국민이 법원의 정치적 중립마저 의구심을 갖고 있다. 검찰은 바람(정치적 외풍)이 불면 그때서야 눕는다지만, 법원은 바람이 불기도 전에 알아서 눕는다는 말까지 회자된다. ‘삼권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음을 여당과 사법부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