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승리의 공학자들》이라는 저술에서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승리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했다. 그는 방대한 사료를 분석해 연합국의 승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물량 공세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 아니라 전쟁의 숨가쁜 고비마다 새로운 과학기술 혁신을 통해 승기를 잡아 나간 과정이라고 봤다. 물론 그 주역은 희생을 마다치 않은 과학기술자들이었다. 전장에서 용감히 싸운 병사들도 영웅이지만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무를 다한 과학기술자들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었다.
근세 들어서면서 서양이 동양을 압도한 것은 산업혁명 때문이다. 증기기관으로 대변되는 1차 산업혁명과 전기의 상용화로 꽃피운 2차 산업혁명이 끝날 즈음의 20세기 초반, 세계는 선진국과 식민지로 갈렸다. 한국도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는 과학기술에 무지했던 결과, 처참하게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전까지 국력이 농업 생산력에 의해 가늠됐다면 산업혁명 이후에는 과학기술이 바로 국력이었다.
과학기술의 위력을 잘 아는 일제는 강점해버린 조선의 백성들이 과학기술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36년을 통틀어 조선 전체에 이공계 대학 졸업자가 400명에 불과할 정도였으며, 박사학위 소지자는 10명뿐이었다. 의학 분야의 박사학위 소지자가 340명이나 됐던 점을 보더라도 과학기술 인력 양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방해했던 일제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민족 역량 강화 운동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가였던 김용관 선생이 그 주역인데, 위험을 무릅쓰고 펼친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다.
김용관 선생은 과학지식보급회를 조직해 계몽운동을 펼치는 동시에 1934년 4월 ‘과학의 승리자가 모든 것의 승리자다’라는 구호 아래 제1회 ‘과학데이’ 행사를 열었다. 과학데이 행사는 2회부터 전국적으로 치러졌는데, 민족지도자였던 여운형 선생의 강연이 있었고, 새로 만든 과학의 노래를 참가자들이 부르며 54대의 자동차와 함께 가두 행진을 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이 운동은 ‘과학조선’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5년을 이어갔지만 아쉽게도 1938년 김용관 선생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면서 그 명맥이 끊어졌다. 선생은 옥고를 치른 끝에 1942년 가석방됐지만 이후 이 운동은 동력을 잃고 말았다.
민족의 미래가 과학기술에 있음을 일찍이 간파하고 계몽운동을 시작한 김용관 선생과 같은 선각자의 희생을 알게 되니,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번영이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요즘처럼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을 때, 과학기술인 스스로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사이언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는 밑바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