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무력감에 빠진 洪 부총리…그래도 계속하라니

입력 2020-11-03 17:07
수정 2020-11-04 00:47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제 사표를 제출했다.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주식 양도소득세 대상 대주주 범위를 내년에도 현행대로 ‘10억원 이상’으로 유지키로 한 데 대해 소신을 관철시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다. 홍 부총리는 소득세법 시행령 규정대로 내년에는 대주주 범위를 ‘3억원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당정은 개인투자자의 반발이 커지고 경제 불확실성이 커진 점을 고려해 대주주 기준 확대를 2년간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사의를 표명한 데는 아파트 공시가격 반영률에 대한 여당과의 이견도 한몫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2030년까지 90%로 올린다는 방침을 밝혔는데 여당이 80%로 속도 조절을 주문하자 이것마저 본인의 의지가 관철되기 어려워 보이자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다. 어제 정부가 공시가격 반영률을 당초 계획대로 90%로 유지키로 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표를 반려했지만 이번 일은 홍 부총리가 경제수장으로서의 리더십에 한계가 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사실 홍 부총리가 주요 정책과 관련, 청와대나 여당의 반대로 소신을 접거나 원래 입장에서 후퇴한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다. 긴급재난지원금 지원 대상, 재정준칙 제정 여부, 증권거래세 인하 등 여권과 의견이 갈렸던 일곱 번의 주요 사례에서 모두 자신의 소신을 접거나 물러서야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홍두사미(洪頭蛇尾)’라는 굴욕적 별명까지 얻기도 했다. 최근에는 홍 부총리가 대주주 기준 ‘3억원 이상’을 고집하자 그의 해임을 요청하는 청와대 청원까지 제기됐다.

정치권의 압박에 입장을 바꾸면 ‘소신 없다’는 비판을 듣고, 경제관료로서 소신을 내세우면 이번에는 정치권은 물론 일반 국민으로부터까지 해임 압박을 받는 식이었다. 홍 부총리가 사표를 제출한 것은 이 같은 상황과 무력감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부총리가 이 같은 처지에 몰리게 된 데는 홍 부총리 개인의 책임도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의 책임이 크다. 현 정부 들어 경제부총리는 물론 대부분의 장관들은 ‘청와대 2중대’ 소리를 들어왔다. 청와대와 여당이 주요 정책 결정을 주도하고 전문관료들은 ‘들러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너무도 잦기 때문이다. 이념을 앞세운 정치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문가의 경험과 식견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지금 홍 부총리가 겪는 자괴감과 마음고생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 고위 공직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 대통령은 사표를 반려하고 재신임했지만 전문 관료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지키라는 것은 홍 부총리에게는 또 다른 고역이 될 수 있다. 청와대와 여당의 ‘정책 폭주’가 멈추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홍남기’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