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을 배출할 수 있을까? 브라질 출신인 호베르투 아제베두 전임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이나 남기고 올여름 전격 사임하면서 시작된 차기 사무총장 레이스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나이지리아 재무장관 출신인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나이지리아 후보와 함께 최종 결선 라운드에 진출했다. 여성 후보만이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면서 WTO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사무총장 탄생은 기정사실이 됐다. 한국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명희 본부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12월 싱가포르, WTO 출범 후 개최된 첫 통상장관회의에서였다. WTO를 탄생시킨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농산물 개방 협상으로 홍역을 치른 한국은 100명 넘는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대표단을 이끈 박재윤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은 대표단 만찬장에서 한국도 여성 통상 전문가를 키우고 있다며 그를 “한국의 칼라 힐스”라고 추켜세웠다. 그때 유명희는 통상산업부에서 WTO를 담당하던 초임 사무관이었다.
힐스는 1990년대 초반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우루과이라운드를 주도했다. 거칠게 한국 시장 개방을 밀어붙여 당시 한국 관료들에게는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남성 일색이던 통상협상 무대에 그의 이름은 새로운 영감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4년, 유명희는 정말 한국의 칼라 힐스가 됐다. 2019년 2월, 한국 최초 여성 통상교섭본부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세계 통상외교 무대의 수장 자리에 오를 기회를 포착했다.
유 본부장의 상대인 나이지리아 후보는 국제무대에서의 오랜 경력을 내세우고 있다. 세계은행 고위직을 지낸 그는 수십 년간 통상관료로서 현장 경험을 쌓은 유 본부장과는 대조적이다. 나이지리아 후보가 국제적 명성에서는 앞서지만, 야구경기장에 나타난 축구선수인 셈이다.
선거 초반에는 아프리카 대세론이 무성했다. 이번에는 아프리카 차례라는 지역별 선호에 대한 공감대, 거대한 표를 보유한 유럽연합(EU)의 아프리카 지지가 그 이유였다. 3명의 아프리카 대륙 후보가 나이지리아 후보로 단일화되면서 아프리카 대세론으로 굳어지는가 했던 사무총장 경선은 미국이 한국 후보를 지지하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EU의 표심이 분열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프리카 지지라고 생각했던 중국 표심의 행방도 불확실해지고 있다. 중국은 한국인이 사무총장이 되면 그들의 사무차장 자리가 사라진다는 실질적 계산과 그간 공들여온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나이지리아 후보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상황은 유동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 본부장은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니며,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고 있다.
국제기구 수장 선출은 개인 역량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위상과 국제정치 역학이 결정적이다. 최근 중국 출신이 국제기구 최고위직에 선출되거나 중국이 후원하는 국가의 후보들이 선출되면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의 파장을 미국은 경험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처하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이해할 수 없는 우유부단함을 보라.
사무총장 선출은 표 대결이 아니라 WTO의 의사결정방식인 ‘컨센서스’에 의해 결정된다. 미국, 중국, EU 간 합의가 도출되면 컨센서스가 이뤄지지만 끝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사무총장 선출이 무기한 연기되거나 타협안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뉴질랜드와 태국이 각축을 벌이던 1999년 2대 WTO 사무총장 선출 땐 하나의 후보로 컨센서스 도출에 실패하면서 뉴질랜드와 태국 후보가 3년씩 사무총장직을 번갈아 맡는 타협안이 나오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유럽 차지로 여겨졌던 WTO의 사무총장 자리는 21세기 들어 변했다. 미국과 유럽이 세계금융기구 수장을 독식(미국은 세계은행, 유럽은 국제통화기금(IMF))하는 구도는 요지부동이지만 WTO에서의 유럽 독주 시대는 끝났다. 21세기에 와서는 뉴질랜드, 태국, 프랑스, 브라질 출신이 WTO 사무총장 자리를 채웠다. 통상대국 한국은 차기 WTO 사무총장을 맡아 위기에 처한 다자통상체제를 개혁해낼 수 있을 것인가? 진실의 순간이 코앞에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