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 한 바퀴 돌기를 즐긴다. 주위를 거닐다 보면 평소 볼 수 없던 것을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을 얻는다. 회사 근처에서도 걷기 좋은 길을 만날 수 있다.
서울시가 ‘걷고 싶은 거리’ ‘낙엽 쓸지 않는 길’로 지정한 정동길이 단연 으뜸이다. 이어진 덕수궁 돌담길은 직장인들의 힐링 포인트다. 적막한 빌딩 숲 사이에서도 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도 고즈넉한 풍경을 편안히 즐기고 싶어 누군가 흘린 이야기가 아닐까?
덕수궁에서 옛 러시아공사관까지 이어지는 ‘고종의 길’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타국의 공간으로 피해야 했던 군주의 한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감리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최초 서양 근대식 학교 배재학당의 이국적인 벽돌 건물은 근대화 물결로 생동감이 넘쳤을 당시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가끔은 사무실 창밖 국보 1호 숭례문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문화재 지킴이 기업으로 지내온 지난 15년 세월만큼 애틋함이 깊다. 많은 이가 숭례문 이야기에 귀 기울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디오 가이드도 새롭게 준비했다. 정겨운 목소리로 설명을 듣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도성 정문 앞을 거닐고 있다.
숭례문 저 멀리 고가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올려다본 서울역 고가도로의 위엄이 생생하다. 지금은 ‘서울로7017’이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많은 이의 걸음을 이끌고 있지만, 그 시절 까까머리 학생의 감탄과 설렘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모습이 바뀌어도 그 터는 기억 깊숙이 남아 추억이 된다.
여정의 종착점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9길 20’ 신한은행 본점이다. 이곳에도 역사가 스며 있다. 옆의 몇 개 건물터와 함께 조선 말기 화폐를 발행하던 전환국 자리로, 고종이 심사숙고해 선정했다고 한다. 인왕산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지세에 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기운이 미친다는 것이다. 그 옛날 고종의 바람대로, 돈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금융회사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
오래된 길에는 지나온 흔적과 딛고 서 있는 현재, 앞으로 나아갈 미래가 아스라이 겹쳐 있다. 세월의 흐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과 함께 호흡한다. 촌각을 다투는 시대, 변화에 앞서고자 애쓰는 사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본다. 내가 가는 길이 역사에 남아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다.
유난히 힘들었던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숭례문 주변 잔디도 어느덧 금빛 옷으로 갈아입었다. 깊어가는 가을, 잠시 여유를 갖고 동네 한 바퀴 찬찬히 돌면서 소중한 옛 추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