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나 장기를 구경하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기가 막힌 훈수를 두는 구경꾼을 간혹 볼 때가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구경꾼이 훨씬 하수임에도 불구하고 묘수를 제안하는 일도 빈번하다는 것이다. 바둑의 명언 중에 ‘장고 끝에 악수 난다’는 말도 있다. 너무 오래 집착해서 생각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판단이 흐려져서 엉뚱한 수를 두는 경우가 생긴다는 의미다. 지나친 몰입과 한 뼘의 여유가 초래하는 차이가 아닐까.
어떤 문제에 당면할 때 중요한 것은 물론 적당한 시간 내에 적절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서둘러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쓰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조급한 마음에 문제를 대충 파악하고 해결책만 찾는다면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가능성이 꽤 높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내 일생을 바꿀 만큼 중요한 문제를 내고 푸는 데 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문제를 내는 데 55분을 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워낙 천재여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푸는 데 5분밖에 안 걸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대로 된 문제를 내야 좋은 해결책이 담보될 수 있다는 것이 본래의 의미일 것이다.
어느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생각이 폐쇄적으로 변해 일을 해결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사항 가운데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수도 있다. 한 뼘의 여유로 폐쇄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불과 수백의 군사로 수십만 인구의 잉카·마야 문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의 격차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잉카·마야 문명의 폐쇄성이 근본 원인이었다. 주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 모든 지식을 이미 다 알고 있으므로 새롭게 알아야 할 지식은 없다고 생각하는 폐쇄성이 몰락의 근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나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라리는 근대 역사를 결정짓는 가장 큰 동인인 과학혁명이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무지를 스스로 알고 새 지식을 갈망하는 것이 역사 발전의 동인이며 이것이 지역별 문명 발달의 정도를 규정했다는 의미다. 《도덕경》에도 성스러운 체, 아는 체를 그만두면 이로움이 100배는 더할 것인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고 나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쳇바퀴만 열심히 돌리는 다람쥐는 한 걸음만 옆으로 비켜서면 정말로 앞으로 전진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 뼘의 여유가 성패를 가르는 근본 요인이 될 수 있다. 지금 문득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자크린느 뒤프레가 연주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