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형 통신사 KDDI와 일본 벤처캐피탈 글로벌브레인 등은 올해 초 국내 비식별화 기술업체인 딥핑소스에 55억원을 투자했다. 이 회사는 개인정보(초상권) 침해를 하지 않으면서 얼굴 데이터를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AI)만 알아볼 수 있게 변환하는 독보적인 기술을 갖고 있다. 각국의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강화되면서 활용성이 높아진 기술이다. 이 회사는 세계 최대 반도체업체인 미국 인텔과도 비식별화 기술을 적용한 안면인식 AI 보안 카메라를 개발하고 있다. 인텔은 보안 카메라의 칩을 담당하고, 딥핑소스는 카메라에 적용되는 비식별화 기술을 개발 중이다. 개발된 보안 카메라는 동남아시아 관공서, 공항 등에 설치될 예정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를 계기로 ‘디지털 대전환(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시대가 앞당겨 도래하면서 국내 스타트업·벤처기업들과 손잡으려는 외국 대기업들이 늘고 있다. 하진우 어반베이스 대표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기술, 독보적인 사업모델을 갖추고 있다면 코로나19는 오히려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美·日·獨 투자 유치에 시장 개척까지
일본 최대 부동산개발업체와 일본 최대 광고기획사는 어반베이스와 합작법인(JV) 설립을 위한 지분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내년부터 부동산컨설팅과 인테리어 마케팅용으로 일본내 수천만세대의 2D 도면을 3D로 구현하기위해서다. 어반베이스의 ‘건축 도면 3D 자동 모델링 기술’이 가능케한 서비스다. 이 기술은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에서 특허를 출원했다. 이 회사는 현재 일본 최대 가구회사와도 계약을 맺고 일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회사는 국내 전체 아파트의 95%인 1000만세대 평면도를 3D도면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해, LG전자 롯데하이마트 퍼시스그룹 에이스침대 등에 제공하고 있다.
레고 계열사인 레고벤처스는 애니펜에 지분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이 회사는 간단한 스마트폰 터치만으로 ‘나만의 증강현실(AR) 콘텐츠’를 만들어 공유할 수 있는 앱 '애니베어'를 개발해 지난해 구글플레이 ‘베스트 AR앱’으로 선정됐다. 이 회사는 ‘헬로키티’로 유명한 일본 캐릭터전문기업 산리오와는 AR 다음 단계인 확장 현실(XR) 플랫폼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XR은 AR과 가상현실(VR)이 혼합된 초실감형 기술이다. 기존 페이스북·인스타그램이 2D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면, 애니펜이 추구하는 플랫폼은 3D SNS다. 두 회사 모두 한국무역협회가 글로벌 대기업과 국내 스타트업간 투자 및 판로를 연결해주는 ‘포춘 500커넥트’사업을 통해 투자유치의 물꼬를 트게 됐다.
화장품 리뷰 SNS '언니의 파우치'와 자체 화장품 브랜드 '언파코스메틱'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라이클은 독일의 화장품 그룹 바이어스도르프로부터 작년과 올해에 걸쳐 20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다. 바이어스도르프는 라이클과 아시아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음향기기전문기업인 소울일렉트로닉스와 JVC의 신형 이어폰엔 모션 모니터링 솔루션 기업인 비플렉스의 기술이 탑재됐다. 비플렉스는 머리의 움직임만으로 보행 자세, 좌우 균형, 보폭, 몸의 각도 등을 파악하는 ‘바이오메크 엔진’ 기술을 보유해 실시간으로 사용자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음성 코칭 기능 등에 활용되고 있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제작사인 유니버셜픽쳐스는 비대면 시장조사 국내 벤처 기업인 미띵스의 기술을 활용해 자사 디즈니 컨텐츠에 대한 고객 반응 조사를 검토하고 있다. 미띵스는 기업이 고객 설문조사나 인터뷰를 직접 만나는 대면이 아닌 화상으로 할 수 있게 지원해주고 얼굴 표정, 휴대폰 사용 패턴 등 고객반응도 분석해주는 플랫폼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대 뮤직비디오 플랫폼인 미국 ‘비보’를 비롯해 미국 1등 통신사 버라이즌, 삼성전자, LG전자, 카카오, 현대카드 등이 모두 이 회사 고객사다.
일본 교세라 계열사는 최근 36억원 규모 계약을 체결해 웹기반 라이브방송 서비스기업인 팀그릿의 초저지연방송 기술을 도입했다. 유튜브로 생중계하면 10~30초 정도의 방송 지연이 발생할 수 있지만 이 기술을 이용하면 지연을 1초이하로 줄일 수 있다. 팀그릿은 교세라그룹과의 계약건을 바탕으로 중소벤처기업부의 ‘구매조건부 신제품 개발사업’과제에 신청해 정부 지원도 받게 됐다. 두 회사 모두 지난 6월 무역협회가 주관한 스타트업 대회 ‘넥스트라이즈 2020’에서 첫 화상 미팅이 판로 개척으로 이어진 사례다.
◆디지털 대전환기…기회 늘어
국내 스타트업들의 해외 진출은 글로벌 대기업들의 ‘개방형 혁신(오픈 이노베이션)’ 흐름에 힘입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통 영역의 사업을 일구던 글로벌 대기업들에게 최근 가장 큰 화두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전통 영역의 글로벌 대기업들은 해당 분야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글로벌 스타트업들과 손잡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설립, 사업 지원 등이다. 박필재 한국무역협회 스타트업글로벌지원실 팀장은 “글로벌 대기업들은 스타트업들과의 연계를 위한 전담팀을 개설하고 있다”며 “상당수 한국 스타트업들도 이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스타트업계는 최근 전세계에서 급성장하는 것으로 주목받는 시장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작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벤처투자 비중은 0.22%다. 미국, 이스라엘, 중국에 이어 4위권이다. 은행권 청년창업재단 디캠프의 김홍일 센터장은 “한국은 기존에도 IT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개발자 인력 수준 대비 임금이 매우 낮은 나라”라며 “아직 유니콘 기업이 적고 관련 규제가 많지만, 글로벌 업체들은 한국 스타트업의 다양한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무역협회의 ‘포춘 500커넥트’사업을 통해 국내 스타트업·벤처 기업과 협업한 글로벌 기업은 세계 최대 화학회사인 독일 바스프, 독일 자동차회사 다임러와 BMW, 프랑스 명품회사 샤넬, 화장품회사 로레알, 이탈리아 자동차회사 피아트 등이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을 통해 국내 스타트업·벤처기업은 투자유치, 납품계약, 기술판매 등 17건의 성공적인 협업 사례를 기록했다. 박필재 무역협회 팀장은 “무역협회는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민간 조직으로서의 역동성을 갖춘데다 국내 7만여개 기업 회원 네트워크를 가졌다는 점에서 해외 대기업들과 쉽게 친밀해질 수 있었다”며 “해외 대기업 뿐만 아니라 국내 대기업에도 벤처·스타트업을 소개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대규/구민기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