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 꿈도 못 꿔"…실종된 전세에 월세 매물만 쌓인다

입력 2020-10-25 07:23
수정 2020-10-25 08:21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는 주부 김모씨(36)는 계약 기간 만료를 앞두고 고민이 많다. 이 일대의 전셋값이 2년 전보다 2억5000만원가량 오르자 집주인이 상승한 전세가격 만큼 월 0.6%의 월세를 요구한 것이다. 김씨는 “집주인이 전세금 5억원은 그대로 둔 채 따로 월세를 150만원이나 받겠다고 해서 걱정”이라며 “이 일대에 전·월세가 워낙 없고 집주인의 요구를 거절했다간 실거주하겠다고 나올까봐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전셋값 급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반전세(보증부 월세)나 월세 매물만 늘고 있다. 새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과 가을 이사철 등의 영향으로 전셋값이 크게 오르며 매물 품귀 현상을 빚은 탓이다. 전세를 구하지 못한 세입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월세를 선택하고 있다. 지난달 서울 아파트 월세가격은 4년 9개월 만에 가장 많이 올랐다. 심지어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겠다는 집주인과 이면계약을 쓰는 상황까지 내몰리고 있다.
전셋값 못 올리게 하니…"월세 받겠다"전세난이 사상 최악을 치닫으면서 부동산 관련 여러지표들은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25일 KB국민은행은 이번주(지난 19일 기준)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 상승률이 0.51%로 2011년 9월 이후 9년 만에 가장 높았다고 밝혔다.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 전세주택 수급 동향 등도 앞서 비슷한 징후를 보여 줬다.

서민들을 더 옥죄는 것은 전세가 상승보다 전세에서 월세 혹은 전세와 월세가 섞인 ‘반전세’로의 전환이다. 잠실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대표는 “이곳에서 중개업소를 20년째 운영하고 있지만 요즘처럼 전세가 없고 반전세나 월세 매물만 나온 적은 처음”이라며 “월세도 매물이 많지 않아 물건이 나오면 바로 세입자들이 계약에 나선다”고 말했다.

집주인들은 전월세상한제에 따라 임대료를 직전 임대료의 5% 넘게 못 올리게 되자 전세를 반전세나 월세로 바꾸며 임대료를 올리고 있다. 국민은행이 조사한 9월 서울 아파트 월세가격 상승률을 보면 전월(0.12%)보다 대폭 오른 0.78%로 폭등 수준이었다. 국민은행이 조사를 시작한 2015년 12월 이래 4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이기도 하다. 월세가격 변동률은 올 2월만 해도 -0.01%였지만 새 임대차보호법 시행(7월 31일) 이후인 8월 0.12%로 확 올랐고 9월엔 0.78%까지 치솟았다.


서울지하철 2호선 잠실새내역 일대 중개업소들에는 ‘보증금 2억원+월세 370만원’ ‘보증금 4억원+월세 300만원’이라고 적힌 전단이 즐비하다. 전세를 구하러 나온 유모씨(43)는 “월 200만~300만원의 월세를 생활비에서 추가로 부담하려면 도대체 얼마를 벌어야 하는 거냐”며 “월세 내다 보면 집을 사기 위한 저축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 지역의 중개업소 관계자도 “최근 세를 놓는 집주인들이 워낙 금리가 낮다보니 전세보다는 반전세나 월세를 선호한다”며 “목돈이 있어도 투자에 대한 규제도 강하니 차라리 월세로 현금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던 회사원 박모씨(38)는 최근 경기 하남으로 이사했다. 전세기간이 4개월가량 남았지만, 살던 집의 전셋값이 2년 전보다 두 배 이상 올라 내년 봄에 다시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져서다. 박씨는 “앞으로 서울은 물론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 지역에서도 전셋집을 구하기가 더 어려울 것으로 봐 미리 이사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84㎡ 아파트에 살던 이웃 주민이 얼마전 보증금 2억원과 별도로 월세 100만원을 더 주면서 같은 단지에서 전세를 다시 구했다는 말을 듣고 이사할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전세난은 안 잡고 월세 부추기는 정부앞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전세 거래가 늘고 있다”며 밝힌 데 이어 국토교통부가 “임대차법 시행으로 전세의 월세전환 가속화는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자료를 내는 등 정부는 임대차 시장에서 월세로의 전환은 사실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론 월세 비중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가격도 오름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선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보다 월세 거래가 더 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월세 거래는 7만1831건으로 1년 전보다 16.6% 급증했다. 이는 확정일자 기준 통계로 여기에 빠진 신고와 이면계약을 통한 반전세 등을 합하면 실거래 증가율은 한층 더 올라간다. 대치동 A공인 대표는 “전월세 3법 시행 이후 전세계약 갱신 시 임대료도 첫 2년 계약 금액의 5% 이내에서만 올릴 수 있게 되자 일부 집주인들은 이면계약으로 세입자에게 월세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예컨대 2년 전 냈던 전세 보증금이 10억원인데 지금 주변 시세가 14억원이라면 임대인과 임차인은 전세 보증금을 5%만 올리는 것으로 계약을 갱신한다. 하지만 이면계약으로 주변 전세 시세와의 차액을 월세로 따로 보전해주는 방식이다. 주변 시세와의 차액 4억원에 해당하는 월세(120만원 X 24개월=2880만 원)는 2년 뒤 10억 보증금에서 제하기로 집주인과 합의하고 차용증을 쓰는 것이다. 이같은 편법은 부동산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공유되고 있다.

이처럼 전세가 반전세나 월세로 전환되는 사례가 늘자 정부는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며 각종 대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부는 현행 4%인 전·월세 전환율을 2.5%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예를 들어 1억원 전세를 월세로 전환할 때 지금까지는 연간 월세가 400만원이었는데 앞으로는 250만원으로 낮추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기존 전세 세입자를 월세로 바꾸는 건 세입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미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새 세입자를 들일 때 월세로 전환하는 것도 전·월세 전환율을 적용받지 않아 실제로 활용되는 사례가 거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방안이 효과가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되자 월세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 방안도 거론했지만 이 또한 전세의 월세 전환을 늦추거나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는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부동산업계의 한 전문가는 “월세 세액공제의 취지는 전세에 사는 사람은 보증부 월세로 밀려나면 정부가 세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것”이라며 “결국 전세가 부족하니 월세를 살라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