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수 나훈아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상기했을 때의 심경은 착잡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통령만은 진정 국익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사심 없이 일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국가에 대해 갖는 믿음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유별나다. 태초에 국가가 있었다고 느낄 정도로 국민들 의식 속에 국가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한 기본권 침해를 묵묵히 수용하는 국민들 모습에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끼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국민은 무슨 문제만 생기면 정부는 무얼 하고 있냐는 비판을 하는데,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자율이라는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수백 년 동안 국가 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쌓은 자유주의 전통이 우리에게는 없다. 자유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할 때 식민지가 되면서 민족의 자유에 대한 염원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염원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분단국가라는 사실과 과거 권위주의 정부의 경험 그리고 교육도 국가주의를 강화시켰다. 친일파에 대한 조정래의 황당한 발언에서 드러나는 과잉 민족주의도 국가주의와 연결돼 있다. 좌파 성향 지식인 최장집 교수도 “국가 권력은 견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국가는 과연 그렇게 신뢰할 만한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는 게 정설이다. 우리는 도덕주의적 국가관을 너무 쉽게 믿어 왔다. 우리만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높이 사는 유럽에서도 한때 그랬다. 1945년 이후 30년 동안 케인스 경제학이 주류로 행세하고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곳곳에 들어서 있을 때 국가는 선(善) 그 자체로 받들어졌다. 국가는 개인을 초월한 거룩한 존재라는 믿음,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수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국가는 ‘좋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관리들이 고결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다. 국가 권력이 커지는 데 누구보다 책임이 있는 케인스도 정치가와 관료는 언제나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었다. 베버가 말한 최소한의 직업윤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스위지는 케인스가 정부를 “인간들이 역경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 구원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쯤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이런 국가의 선한 이미지를 깨부순 것은 공공선택론을 정립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이다. 그는 악화가 양화를 쫓아낸다는 그레셤 법칙을 정치에 적용했다. 윤리 수준이 낮아서 권력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일수록 열심히 노력해 출세하는 반면에, 사심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위 공직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전지전능하고 공평무사한 하나님과 같은 정부가 아니라 사익을 취하는 데 급급한 이기적이고 저질스러운 정치가와 관료다. 관료들은 봉급, 권위, 퇴직 후 경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구를 확장하기 일쑤고, 포퓰리즘에 물든 정치인들이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면서 국가는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은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이고, 저항해 봤자 각자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기 때문에 저항도 없다.
공공선택론에 의하면 정치가들과 관료는 종종 훌륭한 정책을 마다하고 나쁜 정책을 택한다.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다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도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국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권력을 쥔 엘리트가 ‘의도적으로’ 빈곤을 조장하는 정책을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대통령과 고위 관직에 누가 앉아 있는가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 세계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정기적으로 국민이 뽑는 선출직은 공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로 채우도록 하자. 국익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 유지와 제 이익만 챙기는 하치 정치가들은 퇴출시켜 버리자. 한데 내 생애 그런 날이 올 것인지, 막막하다.